경수는 가끔 모래를 떠올렸다. 운동장을 생각했다. 견디던 것들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뭐라뭐라 고함을 쳤고 경수는 울었는데 결국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장난감 총을 잘 다뤘었다. 손가락에 살짝 힘만 주어도 튀어 나가는 총알을 보며 어렵진 않을 거라고 자신했었다. 누군가에게 지더라도 속상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렇지만 운동장은 너무 더웠고 아버지가 시키는 훈련은 생각보다 고됐다. 피를 쏟는 줄 알았는데 침이었다. 온 몸이 통증으로 당겨서 잠들지 못했다. 총 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하고싶지 않아요, 그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쓰러지던 날엔 모래 바람이 불었다. 헥헥 거릴때마다 까끌거리는 모래가 입 안을 상처냈다. 경수는 경수에게 져버렸다. 그래서 경수는
천천히 받아들였다. 위로 죽은 형이 있는데 녀석이 있었더라면 좀 달랐을 거란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다 구라일수도 있었다. 아들 자식만 생기면 잘 가꿔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보물을 만들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아버지는 경수로 인해 그 꿈을 접었다. 경수는 몸이 약했다. 그리고 실은 약하지 않았다. 선수가 되기에 부족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식 새끼가 소년 체전에도 출전하지 못하는 종자라는 걸 납득하지 못했다. 장난감 총을 보면 화를 냈다. 짜가나 갖고 놀아서 그 꼴이 된 거라고 혀를 찼다. 그늘은 경수 차지가 됐다. 경수는 응달 위에서 자라났다. 조금은 구부정하게.
모자란 취급에 걸맞게 자라주었다. 경수의 삶은 쇠퇴한 종목의 경기장이다. 아무도 경수를 겨누지 않고 경수 또한 아무것도 겨냥하지 않는다.
타인의 과녁
경수네 아버지는 중·고등학교 사격부의 감독이었다. 주 종목은 공기권총. 산만하고 힘 좋은 애들을 우선 골랐다. 얘들아. 이거 하면 집중력 좋아진다니까?너 게임 좋아하지. 다 연결돼 있는거야. 그럴 듯한 말로 애들을 꾀었다. 반은 첫 훈련에서 나가 떨어졌다. 기초 체력 훈련을 시키면 1분도 안돼 힘들다며 뻐겼다. 나머지 반은 어찌어찌 하는 듯 싶다가도 며칠 후 못하겠다며 발을 뺐다. 사람 좋은 도 선생은 밖에선 성군이고 사격부에선 엄한 감독이고 집에서는 폭군이었다. 틀려먹은 새끼들이라니까, 그거. 군대로 보내서 말뚝을 박아버려야 해. 그런 날이면 경수는 코너로 몰렸다. 경수네 아버지는 기쁨 보다는 스트레스, 악, 분노 같은 것들을 경수와 나눠 가졌다. 경수는 총알받이가 되는 일에 무뎌져갔고 종종 잠을 설쳤다. 꿈 속의 아버지가 경수를 향해 총을 들었다. 타앙이었는지 탕이었는지. 귀가 찢어질만큼 큰 소리였다. 경수는 무덤덤했고 올 게 왔다고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점수도 매겨줬을 것이다. 아쉽지만 과녁을 빗나갔네요. 저는 아버지의 과녁이 아니거든요.
식탁 옆에는 아버지의 위대한 제자 중 한 명의 인터뷰가 걸려 있었다. 뻣뻣한 사격복, 이제는 익숙해요. 대한민국을 빛내는…. 경수는 거기까지 읽었다. 경수의 상장은 한 번도 저 자리에 놓이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빛낼 포부 같은 게 없어서 그런가. 그렇지만 내 또래는 가족 정도만 빛내도 예쁨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목소리도 모르는 형을 미워했다. 툭 치면 눈알이 쏟아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체격이 좋았고 성격도 좋아 보였다. 그래서 기도했다. 저 형이 죽었다 깨어나도 대한민국을 빛내지 않게 해주세요. 몇 년 후면 아시안 게임에서 볼 수 있다더니 몇 년이 지나도 조용했다. 경수는 직감했다. 유망주가 결국 유망주로 끝났음을. 경수의 기도가 먹힌 모양이었다. 한 동안 그 자리는 휑했고 아버지는 전보다 신경질적으로 굴었지만 경수는 살 만 했다.
그리고 경수는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두부를 건져 먹는데 몇 번이고 실패했다. 흐물흐물한 두부를 숟가락으로 꺼냈다. 아버지가 와인을 먹고 싶다고 했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열 일곱. 경수는 새벽이 편했다. 잠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교복은 컸고 교과서는 무거웠다. 아버지는 낡은 가죽 가방에서 양복처럼 뻣뻣이 다려진 플라스틱 파일을 꺼냈다. 누군가를 인터뷰한 기사였다. 아버지가 한 마디 했다. 이 새끼는 물건이라니까. 꼭 총잡이 같아.
다들 늦은 나이라고 했지만 저는 알았어요. 저에게 재능이 있다면 그건 사격이라는 걸요.
뭔가를 가진 녀석들은 이름부터가 비범한 데가 있어서 어쩐지 재수 없었다. 그날부터 경수는 백현의 얼굴이 실린 기사 아래서 밥을 먹어야 했다. 경수는 백현의 처진 눈매가 싫었다. 그 형처럼 대한민국 어쩌고 하는 허세를 부린 것도 아닌데 속이 메스꺼웠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백현은 기어코 빛날 것 같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억울해졌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계속해서. 경수는 백현의 유순한 눈매 아래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과자를 삼켰다.
경수네 아버지가 백현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저녁이었다. 식탁 옆에 제 얼굴이 버젓이 걸린 걸 보면서도 백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이따금 경수를 쳐다봤는데 경수는 그럴 때마다 간신히 무언가를 씹는 중이었다. 백현과 경수네 아버지는 퍽 잘 어울렸고, 경수는 그게 바로 제 아버지가 오랫동안 꿈꾸던 그림이라는 걸 알았다. 백현은 초대받았지만 경수는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그릇 먹을 것을 반 그릇 먹었고, 반 그릇 먹을 것을 전부 남겼다. 흰 쌀밥에 양념만 대충 묻힌 채로 일어나는 경수에게 아버지는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백현은 친한 친구처럼 경수를 불렀다. 경수야. 살가운 목소리였다. 경수는 대번에 불쾌한 낯이 됐다. 백현은 그때도 별 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저희 학교에서 친하거든요. 뻔뻔한 말투였다. 경수가 정정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더 빨랐다. 아들 도경수는 마뜩 찮아도 변백현 친구 도경수는 괜찮은가 보았다. 경수를 시종 다루듯 했다. 경수는 듣기 싫어서 주방 개수대의 물을 틀었다. 먹다 남은 밥을 버리고 그릇을 씻었다. 물 위로 기름이 떠다녔다. 경수야. 백현이 한 번 더 불렀던가?알고 싶지 않았다.
후식으로는 사과를 먹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아버지는 스포츠 채널에서 멈췄다. 골프 경기였다. 필드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무는 선수의 얼굴이 잡혔다. 땀이 나는지 몇 번이고 골프채를 고쳐 잡았다. 경수는 아버지의 다음 말을 알았다. 그리고 그 말은 백현에게서 나왔다.
저 사람 지겠네요.
그렇지. 저러면 안 되는 거거든.
티나잖아요. 쫓기는 거.
사과는 딱딱했다. 이빨이 아팠다. 경수는 양치를 하겠다며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곤 거실로 향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경수에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다. 종목은 달라도 스포츠는 비슷한 거라며,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경수는 정말로 그 말을 따랐다. 앓는 소리가 나오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주제넘는 의지였다.
안녕.
기어코 방까지 쳐들어온 백현이었다. 경수는 진짜로 울 때면 눈물 한 방울에도 얼굴이 시뻘개졌다. 피부가 아팠다. 경수는 고개를 숙였다. 백현이 얄미웠다. 그렇지만 얄밉다는 말은 좀 유아틱한 데가 있어서, 입 밖으로 내기가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경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른 체 하며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x축과 y축. 조용히 읊조렸다.
왜 대답 안해줘?
하기 싫으니까.
와.
감탄의 ‘와’가 여기서 왜 나와?
목소리 되게 좋다, 너.
감독님한테 너 보여달라고 졸랐거든. 지금 뭐해? 수학 문제 푸는 구나. 나도 국어보단 수학이 낫더라. 국어는 모호하잖아. 난 모호한 거 싫어. 사격 할 때도 제일 거슬리는게 그런 거거든. 애매하게 쏘는 거.
나가.
응?
나가라고.
중얼대는 꼴이 거슬렸다. 거슬리다와 싫다가 동의어인가?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모호한 것이 무서운 것은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나가라고 두 번이나 말했는데도 그대로여서 풀던 문제집을 던졌다. 백현을 맞히진 못했다. 종이 위로 가지런히 놓인 x축이며 y축이 무너졌다. 백현의 마지막 말만 또렷이 남았다.
경수는 확실하네. 난 그런 거 좋아.
*
열 여덟. 경수와 백현은 같은 반이 됐다. 짝꿍도 됐다. 백현이 자릴 비운 종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는 세시 반부터 훈련인데 요즈음은 대회 철이라 더 바쁘게 움직이는 거라고 했다. 다음 날 백현은 인사 대신 손가락을 흔들었다. 꼭 허공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 같았다. 방아쇠를 쥐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난 너 싫어.
경수는 대놓고 말했다.
난 씨발 총질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래서 네가 싫은거야. 경수는 사실 그렇게 일갈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 말도 꼭 해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럴 기회는 잘 오지 않았다. 백현은 경수가 대놓고 싫다고 하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괜찮아. 나 좋아하는 애들 많아. 그 말은 꼭 경수도 그렇게 될 거라는 뜻 같았다. 모두가 백현을 알았다. (그 말을 곧 모두가 백현을 모른다는 것과도 같았다.) 제 26회 회장기 배 전국 중·고등학생 사격대회 남고부 1위. 타이틀은 화려했고 외모는 수려했다. 주종목이 배그인 남자 애들이 백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참패했다. 실전에서 쏘는 새끼라 다른 모양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통에 경수는 짝꿍이면서도 백현을 마주할 시간이 적었고 말 좀 섞어볼라치면 다른 녀석들이 백현을 독점했고 곁이 좀 한가해졌다싶으면 백현이 훈련에 갈 시간이었다. 말을 터 봤자 할 말이라곤 ‘너같이총질하는새끼랑은절대안친해질거라는’ 것이었는데 그 얘기를 하려고 백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이상했다. 경수는 곧잘 남들에게 상처 입었는데 정작 남에게 상처를 주려고 하니 모든 게 쉽지 않았다.
경수는 백현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백현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졌다. 어쨌든 이건 백현에 대한 팩트니까. 보통 사격부 애들이 중학교 1학년때부터 사격을 시작하는 것과 다르게 열 여섯에 사격을 시작했다는 것. 악바리라 불릴 만큼 기초 훈련에 매진했다는 것. 벌써 사격은 멘탈 경기인 것 같더라구요, 하고 자신스레 말하는 패기 같은 것. 그렇게 백현을 알아낸 다음 날이면 유독 더 백현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백현은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대답했다. 저에게 재능이 있다면 그건 사격이라는 걸요. 미래를 확신하는 백현의 목소리가 탐나서, 경수는 그 다음날 백현을 붙잡고 그 동안 마음속으로 수십번 연습했던 백현을 할퀴는 말 대신 다른 걸 꺼냈다.
사격이 왜 좋아?
백현은 뭘 그런 걸 묻냐는 태도였다. 점심 메뉴를 답하듯 말했다.
남의 것 맞히는 게 좋아서.
그게 왜 남의 거야? 네 과녁이잖아.
맞히기 전엔 아니지. 맞혀야 내 거고.
그리곤 백현은 두 팔로 경수의 가슴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다. 팔이 얽혔다. 힘줄이 섰다. 손가락은 부드러운 선을 그리면서도 확실한 위치를 찾아 구부러졌다. 입으론 장난스러운 소리를 냈다. 빵!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유년기의 어느 날, 경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총을 쥔 것을 봤다. 조기 교육이랍시고 어린 경수에게 대충 입사자세를 보여준 것 뿐이었는데 경수는 자지러졌다. 백현 또한 총을 쏘는 사내라는 걸 경수는 깨달았다. 경수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총을 다루는 사람들의 얼굴은 늘 무언가에 골몰하는 중이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욕구가 들었다. 매달리고 싶다고 해야하나. 가지고 싶다고 해야하나. 경수는 그게 무서웠다. 그건 어딘가 부딪혀야만 끝나는 총알처럼 경수의 뱃속을 간지럽혔다. 계속해서 회전하며 경수를 건드렸다.
경수는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 백현은 대뜸 가까이 왔다. 가지런히 정리된 경수의 하복 셔츠를 막 헤쳤다. 옆에 있던 애들이 변백현 빡친거냐며 경수 쪽을 주시했는데 결코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백현은 아랑곳 않고 마저 단추를 풀었다. 흰 면티에 얼굴을 갖다 댔다. 의학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백현의 귀가 경수의 심장에 닿았다.
내가 너 맞혔나봐. 존나 빨리 뛴다.
그리곤 킥킥.
경수는 얼이 빠졌다. 정작 경수를 명중시킨 녀석은 밥 잘 먹고 정규 수업 중 반은 졸다가 세시 반이 되기도 전에 일어나서 훈련장으로 향했다. 대학 진학보다는 사격으로 유명한 곳이라 뭐라 하는 선생도 없었다. 빈 자리를 볼 때마다 경수는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백현이 말했던 박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그곳에 뭔가가 박혀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득해졌다. 경수야 총알이 무서운 이유가 뭐냐면 총알은 그곳에 딱 박히는 게 아니라 몇 번이고 거길 뚫고 파고들어서 흠집을 내는 거거든.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다정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경수에게 그렇게 속삭이곤 했다.
*
사격부 훈련장은 새삥이었다. 지자체에서 실시한 미래 인재 육성 사업에 선정 돼 받은 예산으로 지은 것이었는데, 괜히 엘리트 체육이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닐 정도로 그 설비가 뛰어났다. 근방에 있는 중·고등학교 훈련장과는 다르게 전자표적 시스템도 도입된 상태였다. 오랜 기간 누적된 데이터들은 선수들의 보완점을 실시간으로 진단하고 좀 더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을 마련했다. 특히나 감독을 맡고 있는 도 우혁씨는 선수들이 사용하는 파지 손잡이를 다듬는 일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서, 국가대표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 선수들도 파지 손잡이 교정을 맡기곤 했다. 전방을 꽉 채운 35개의 사선. 훈련장을 비롯한 선수들의 숙소 및 휴게실, 그리고 편의시설까지. 국제 사격연맹에서 인정할 정도로 그 수준이 대단한 곳이었다-고 경수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실제로 찾아간 훈련장은 그 현란한 수식어만큼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국제 사격연맹이 이 곳까지 왔을 리가 없었다. 경수는 조금 우스웠다. 고작 이만한 곳에서 뭘.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하찮게 여기면 찰나의 승리감이 몰려왔다.
자식보다 더 어여삐 여기는 사격부원은 열 한명이었다. 공기권총이 여덟 명. 공기 소총이 세명으로, 아버지가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학생은 백현을 비롯해 여덟 명 이었다. 언뜻 기색을 살폈는데 간간이 총소리만 들릴 뿐 말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경수는 백현을 찾았다. 백현이 어디있는지 둘러 보면서 경수는 백현을 보려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제법 흉내를 내는 애들이 다수였다. 밋밋한 등짝을 훑던 경수의 시선이 구석에서 멈췄다. 똑같이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자세였는데 어딘가 달랐다. 다른 애들의 뒷통수에선 느껴지지 않던 무서운 집요함이 백현에겐 있었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 모니터엔 다른 애들과 다르게 두 자리 숫자가 떴다. 텐. 경수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백현의 훈련은 계속됐다. 경수는 저도 모르게 그 앞을 지켰다. 백현의 자세를 보는지, 백현의 총을 보는지, 백현의 과녁을 보는지는 정확히 판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백현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백현은 사격에 집중했고 경수는 백현에게 집중했다. 발끝이 짜릿했다. 어슬렁거리던 코치는 간간이 학생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백현만 딴 세상이었다. 아무도 백현을 방해하지 않았고 경수는 간절히 백현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왜 그건 나에게 오지 않고 너에게 갔어?
아버지가 총을 쏘는 모습을 본 건 초등학교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때도 경수네 아버지는 중학교 사격부의 코치였다. 유독 사격부에 지원하는 학생이 적은 지역이었고 그런 애들을 회유하려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던 때였다. 주말 사격 학교랍시고 애들을 모아놓고 시범을 보였다. 피방 가려고 벼르던 애들을 억지로 모아둬서 그런지 재밌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야 이것봐. 총 존나 무거워. 그런 불만이나 주절거리는게 다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굴하지 않고 자세를 잡고 총을 쥐었다. 따라온 경수만 박수쳤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자리에 스스로를 넣었다. 아버지는 매번 멋있었다. 경수는 멋있고 싶었다. 멋있게 총을 쏘고 싶었다.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경수는 멋있게 살아갈 기회를 잃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윤기날 수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누군가 경수 앞에서 총을 쏘는 중이었다. 경수가 아는 감각이었다. 백현은 멋있었다. 멋있어서 욕심이 났다. 빼앗길 까봐 조바심이 일었다. 스포츠는 조바심을 내면 망하는 거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된 걸지도 몰랐다. 백현이 뒤를 돌았고 경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백현은 천천히 총을 내려놓고 경수의 숨으로 하얗게 번진 유리문 앞까지 다가왔다. 경수는 도망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고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 해야할 훈련이 무서웠지만 기어코 잠들었던 때처럼.
*
경수는 백현을 밀어내지 못했다. 바짝 긴장한 채로 훈련하던 백현의 몸은 땀으로 축축했다. 입술도 비슷했다. 백현은 경수의 입으로 숨 쉬는 것처럼 굴었다. 말랑한 혀를 비볐다. 자세가 불편한 경수가 몸을 비틀 때마다 따라붙었다. 자연스럽게 경수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각도가 달라지면서 경수는 헐떡거렸고
난 네 과녁이 아냐.
무작정 그렇게 말했다. 백현을 저격한 말은 아니었다. 사람에게건 세상에게건 꼭 한번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백현은 몸을 흔들며 웃었다. 총을 쏜 뒤 살짝 흐트러지는 것과 같은,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그런 건 내가 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