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는 혼자 조별과제 중이다. 혼자?
드라마 한 회당 출연료가 몇 천이라는 비싼 몸값의 조원1에게는 협박 문자를 보내 두었다. 오늘로써 열 통 째였다. 악에 받친 최후 통첩. 연예인인지 나발인지 난 모르겠고 오늘까지 연락 안 되면 ‘변XX 인성’으로 커뮤니티 집요하게 도배 할테니까 어디 견뎌봐.
경수가 처음부터 이렇게 강짜를 부린 건 아니었고,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상습 사랑 구간
上
경수는 이번 학기 전액 장학금을 놓쳤다. 대학을 공짜로 다니는 건 경수의 특기 중 하나였다. 거져먹는 건 물론 아니었거니와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도경수, 그 맨 앞?
‘잘생긴 애’보다 ‘끈질긴 애’로 유명한 경수였다. 경수의 외모가 다른 요소에 밀리기 위해선 웬만한 정성으론 부족했다. 대학은 사유보다 암기를 높게 쳐주었다. 경수는 강의마다 수업 내용을 통째로 녹음한 뒤 빠짐없이 정리했다. 교수 아저씨의 아재 개그까지 모조리. 지성은 얄팍해지고 통장은 두둑해졌다. 0이 찍히는 등록금 고지서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었다.
재미없는 애가 됐다. 과감히 포기했다. 어차피 코흘리개 스무살 사이에서 유달리 재치있는 녀석으로 꼽힌다 한들 인생이 썩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카톡 친구 몇 백명을 달성하는 게 다겠지.)
“반액이요?”
교학처에서 얘기를 듣자마자 경수는 이를 갈았다. 좌절하는 시간마저 사치였다. 폴더를 세분화했다. 두고 봐. 나 다음 학기에 4.5 받는다.
춘삼월을 앞두고 전운이 감돌았다. 경수는 빼앗긴 반절이 아쉬워 잠을 설쳤다. 동기들이 방학 간 있었던 시시한 연애담을 나누는 동안 경수는 공책에 네임펜으로 큼지막하게 강의 제목을 적었다. 스카이캐슬의 예서도 한 수 접고 들어갈 기세였다. 교수들은 하나같이 따분하게 생겼고 애들은 뒤늦은 겨울잠에 빠지기 위해 롱패딩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경수는 외투를 벗었다. 니트 소매를 걷으니 정신이 말끔해졌다. 큰 눈을 빛냈다.
교수님, 이 수업의 학점 헌터는 접니다. 저에게 A+을 주실 수 밖에 없을 거예요.
조별과제, 가 경수는 두렵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임하리라는 헛된 기대도 버린 지 오래였다. 남의 몫까지 하는 게 뭐 어때서? 결과적으로 잘하면 그만이지.
그렇지만 이런 건.
“도경수 학생. 고생 좀 하겠어. 인원수 맞추려다 보니 어쩔 수 없더라고.”
네 명이서 해야 마땅한 조별과제를 세 명이서 하는 것? 괜찮았다. 경수는 어차피 평소에도 남들보다 두 배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잇속에 밝고 셈에 능한 도경수 하나를 가지는 게 어중이 떠중이 열을 가지는 것 보다 나았다. 중국인 한 명? 역시 아무렇지 않았다. 글로벌시대에 외국인 한 명과도 소통이 안 되면 살아남기 어려울 터였다. 다 좋았다.
“누구라고요?”
“변백현. 모르나?”
“알아야 해요?”
“경수 학생은 티비를,”
“네 저 티비 안보고 유튜브는 경멸하고 인스타는, 그걸 대체 왜 하는 걸까요?”
“라이징 스타라던데.”
“뜨는 주식도 모르는 데 뜨는 스타를 알 리가, 없잖습니까.”
뒤늦게 예의를 차렸다. 갑자기 예스러워진 말투가 어색했다.
“우리 가족들이 참 좋아해요.”
“아, 네.”
“특히 우리 딸내미가 싸인 좀 받아달라고 그렇게 난리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간신히 갈무리한 반골 기질이 버릇없이 튀어나올 뻔했다. 경수는 체제에 잘 순응하는 편은 아녔다. 아부도 잘 못 떨었다. 요령 없이 앞자리를 사수하는 건 스스로의 성정을 익히 알아서였다. 얌체 같은 애들이 교수랑 쉬는 시간에 귤 까먹고 주말이면 교수네 집엘가 하하호호 만담을 나눈 뒤 A를 받아갈 때 경수는 시험지를 빽빽이 채우고 한 장 더 달라고 해 그것마저 빽빽이 채우는 스타일이었다. 이래도 니가 A+을 안주고 배겨? 학구열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경수를 이길 수 있는 교수는 몇 없었다.
“아마 바쁠텐데. 왜 휴학 처리가 안 됐지. 학사 시스템 오류인가.”
“…”
“번호 알려 줄 테니 한번 연락해봐요. 다른 데 뿌리진 말고.”
“뭘 뿌려요?”
제 학점을 뿌리란 소리는 아니시죠. 설마?
경수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엔 빠삭했지만 급변하는 미디어 시장엔 맥을 못 췄다. 네이버 뉴스에서 보는 카테고리는 정치, 경제, 사회가 전부였다. 한물 간 정치인의 정계 복귀 소식은 알아도 유명 아이돌의 컴백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경수가 아는 연예인은 모두가 아는 연예인이었다. 한국인으로 의심 받지 않을 정도의 교양 수준만 겨우 갖춘 경수였다. 몸속에 나이 먹은 사람의 영혼이 들어 앉았다 해도 납득이 갔다.
또래 남자애들이 죽고 못 사는 여자 아이돌도 모르는데 또래 여자애들이 홀딱 빠진 변백현을 알고 있을리가. 경수는 컴퓨터를 처음 만져 본 아이처럼 키보드를 눌렀다. ‘변’만 쳤는데 끝났다. 무슨 사람 이름이 이렇게 바로 떠? 어쩐지 분해 ‘도’를 쳐보니 ‘도미노피자’가 제일 먼저 나왔다. 딱히 기분 상할 건덕지도 없었는데 괜히 짜증이 일었다.
프로필을 훑었다. 젊은 나이에 많이도 해드셨다. 종합해 보자면, 변백현은 지난 해의 베스트 아이콘이면서 뉴스타인 동시에 태평양 신인이었다. (혹 대서양 신인도 있나? 경수는 혀를 찼다.) 변백현을 수식하는 단어를 기사에 다 실으려면, 과장 않고 타이틀 만으로 기사를 채워야 했다. 이 좁은 대학교에서 노실 분이 아니었다. 대단한 후광이 유지만 된다면야 대학교에서 제적을 당해도 별 상관이 없을 터였다. 시스템 오류일지도 모르겠다는 교수의 말에 힘을 실었다.
변백현이 (아마 놓쳤을) 휴학 처리를 완료하고 나면 조는 재편성될 예정이었다. 네 명이서 하는 과제를 두 명이서 하는 건 도가 지나치게 불공평했으니까.
스크롤을 내렸다. 변백현의 출연이 예정된 드라마에 관한 기사는 경수가 스크롤을 내리는 중에도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후킹할 만한 단어만 골라 트래픽을 채우는 언론의 행태…에 관한 특집 다큐멘터리를 본 것도 같은데. 경수의 생각 회로는 연예면에서 출발해도 결국엔 시사면에 도착했다. 헤드라인을 차지한 드라마의 제목은 읽자마자 잊어버렸다. 이유는 다양했다. 첫째, 길어서. 둘째,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서. 셋째, 사랑 타령이 지겨워서.
<상습 사랑 구간 :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타이틀 촬영은 일산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백현은 다섯 번째 매니저를 해고한 참이었다. 운전 시 우회전을 할 때마다 노래를 흥얼거려서였다. 코창력으로 지구를 제패할 놈이었다. 네 번째 매니저는 대기 시간에 여자 BJ에게 후원을 하던 걸 목격한 뒤 내쳤다. 난데없이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항의 한번 제대로 못했다. 백현은 친절하고 상냥했으니까. 성격이 무던한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연예게 바닥에서 얌전한 축이었다. 몇 가지 사항만 조심하면 돼. 대표는 그렇게 언질하곤 했다.
사실, 몇 가지 사항은 조심하고 수십 가지 사항은 주의하고 수백 가지 항목을 신경써야 백현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다. 백현은 예민했다. 모두의 짐작보다 더.
-콧소리로 노래하는 새끼는 대체 어디서 구한 건데.
-다음 매니저는 제발 조용한 사람으로 부탁해.
급변하는 계절. 나날이 누적되는 피로. 눈을 감았다 뜬 백현의 얼굴엔 날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변백현 씨 핸드폰 맞죠?
백현의 핸드폰에 그런 문자는 너무도…정말 너무도 많았다. 아이돌 역할로 열연한 웹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어서인지 아이돌이 감당해야 할 고통도 같이 따라왔다. 백현오빠, 백현오빠 핸드폰 맞아요?
경수의 문자는 (당연히) 씹혔다. 소속사는 새 매니저를 구하는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백현은 긴 대사를 능숙하게 뱉기 위해 애썼다. 경수는 제비뽑기에서 2를 뽑았다. 당장 다다음주가 발표였다. 연락해봤니? 교수의 걱정 어린 참견에 경수는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혼자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묵살당했다. 경수 학생, 함께사는 세상이지 않나. 얼토당토않은 훈수에 얼이 빠졌다. 유동동 학생도 있고 말이야. 첫 수업 이후로 쭉 자체 휴강을 실천하고 계신 중국인 유학생까지 끼어들자 경수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교수님 저한테 뭐 돈 떼이셨어요? 소리 지르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변백현 씨 맞죠.
-맞잖아요.
-수업 나오실 거예요?
-교수님이 얼굴 보고 과제 하래요. 최소한 페이스타임이라도.
-바쁘신 거 아니까 제가 갈게요.
-저기요.
영양가 없는 문자를 계속해서 보냈고 번번이 무시당했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도 신호음 외엔 듣질 못했다. 의구심이 들었다. 교수가 알려준 번호가 그의 ‘진짜’ 연락처가 맞을까? 잘은 모르지만, 유명한 연예인들은 핸드폰을 두 세 개씩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 만약 이 번호가 그의 내밀한 소통 창구가 아니라면, 이번 생애 그를 만나는 일은 없다고 봐야 옳았다. 교수는 같은 조라면 면대면으로 토의를 하길 원했고 경수는, 화산이 폭발한 듯한 현란한 패턴의 티셔츠를 입은 유동동씨를 설득했다. 같은 조도 됐는데, 우리 밥 한 번 먹을까요. 장소는 제가 정할게요.
(잘난) 변백현의 소속사로 찾아갈 심산이었다. 철 지난 러브 액츄얼리를 베꼈다. 유성매직으로 스케치북을 채웠다. 인사는 생략. 문구는 간결하고 호소력 짙게. <저희의 학점을 살려 주세요> 기사화되기 딱 좋은 자극적인 문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계획은 무산되었다. 스케치북을 맡겨둔 유동동 씨가 습관을 이기지 못하고 당일 잠수를 탔기 때문이었다. 조원1, 조원2가 쌍으로 물밑으로 가라앉자 경수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변백현 니가 돈 잘 버는 스타면 다야? 유동동 니가 돈 걱정 없는 푸얼다이면 다야? 유동동 씨는 욕을 해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될 테니 타겟은 변백현이 됐다. 어차피 사용하지도 않는 번호인데 무슨 대수인가 싶었다.
-야
-변백현.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너 때문에 내 장학금 날아가면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면 돈으로 해라. 번지르르한 말 절대 사절.
-너 왜 인기 많아?
-왜 많아 대체?
-이렇게 사람 말을 씹는데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너 무슨, 일인극 달인이야?
-오늘까지 연락 안 되면 변백현 인성 수준,으로 온 커뮤니티 도배해줄테니까 견뎌봐.
그리곤 누웠다. 4.2나 4.3으로도 전액 장학금을 딸 수 있을지 따져보다 마음이 팍팍해졌다. 방음 시설이 영 별로인 자취방에서 곤히 잠드는 기술은, 애저녁에 터득했다. 핸드폰이 일순 발광했지만 경수는 꿈나라에서 피로를 푸느라 바빴다.
-프로필 봤으면 말은 까지 말지.
중간에 잠깐 깼다. 미지근한 생수를 들이켰다. 노을이 막 사라진 자취방은 어둑어둑했다. 불을 켤 정도로 깨어나고 싶은 건 아니어서 몸을 뒤척이기만 했다. 충전기를 잘못 꼽아뒀는지 배터리가 바닥이었다. 백현의 것은 숱한 스팸 문자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불퉁한 답장에 적당히 대처했으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경수는 그저 느리게 화면을 누를 뿐이었다.
-까고있네.
백현은 광고 촬영장에서 대기 중이었다. 손질이 덜 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백현은 청초하면서도 위험한 기운을 풍겼다. 손을 뻗으면 맘껏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정작 뒤돌면 무엇을 만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백현에 대한 그 바닥의 평가는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백현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얼굴 반반하지. 연기, 좋지. 구설수도 없고. 근데 좀 무섭달까. 속에 구렁이 아흔 아홉 마리는 든 것 같어. 애가 어려서부터 굴러서 그런가.
아역으로 활동할 때만 해도 백현은 주인공의 친구 중 한 명을 맡았다. 때로는 친구의 친구가 되기도 했다. 열 시간을 기다려 두 컷을 찍었다. 비중이 적다고 사람이 아닌 건 아닌데 대사가 하나같이 성의가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AI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일 있어? 만 백번 말하다 끝난 적도 있었다. 주인공의 일상을 궁금해 하는 건 조연의 숙명이었다. 자립심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주연을 보좌하다 뼈가 삭았다. 같은 아역으로 묶여도 취급이 달랐다. 철없는 어린 스타들이 부리는 객기를 흉보다 저절로 꼰대가 됐다.
한 시간 일찍 나오고 한 시간 늦게 나갔다. 남들이 대본에 밑줄을 두 번씩 그을 때 백현은 세 번 그었다. 선배들에겐 깍듯했고 후배들에게는 예의를 차렸다. 타고난 겸양이라기보단 뜻하는 바를 위해 몸을 낮추는 거였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선이 얇은 자신의 얼굴을 분명히 그리기 위해 똑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볼 사람들이 떼로 생긴다는 데 인생을 걸었다.
라이징스타는 시작에 불과했다.
변백현 인성 수준?
대관절 누구신데 제 청사진에 끼어드세요.
“이거 뭘까.”
“형님 빠순이들 중 한 명인 것 같은데요.”
“나 때문이 지 장학금이 날라간다는데.”
“형님 덕분에 공부에 집중을 못하겠나부죠.”
“…”
“저도 가끔 형님 얼굴 보다가 운전실수 하고 그럽니다.”
“…”
“2차선으로 달리다가 형님 얼굴 보면 그냥, 바로 삼차선. 아주 두근두근 장난 없슴다.”
급하게 구한 매니저는 지역 건달 조직에 잠깐 몸담은 전적이 있었다. 덩치가 좋았고 (다행히) 문신은 없었다. 아이돌 가수인 양 늘어난 사생팬에 대비하기 위한 소속사의 조치였다. 백현은 어리고 맹목적인 여자애들을 꺼리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하는 것은 이런 허세 가득한 부류였다.
너 저번에 대학교 신입생 역할 맡았다가 연기가 성에 안 찬다고 한 학기라도 직접 겪어봐야겠다 그래서 등록해 둔건데 취소하는 걸 깜빡했다. 이번 주 중으로 바로 처리할게.
백현은 경수가 가소로웠다. 잘 나가다 고꾸라지는 인생은, 숱하게 목격했다. 꾸며진 미소를 지었다. 대중이 공인에게 바라는 자세를 겸허히 수용했다.
안녕하세요, 변백현입니다. 저는 목요일 저녁에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소속사와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만나 뵙고 직접 사죄를 드리고 싶은데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글자마다 정성을 담았다. 연예인이 과하게 몸을 숙이면 사람들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자리를 뜬다는 걸 알아서였다. 20대 남자애들? 뻔하지. 자기 의견 피력 하는데 서툴고. 속 좁고. 변백현이 뭐가 잘생겼어? 를 읊고 다니면서 정작 미용실에 가서는 내 사진을 꺼내는. 그그정도까지는아니고그냥알겠어요다음부턴이이러지마세요. 고루한 예측을 했다. 배짱도 없으면서 덤비는 것만 잘하지.
경수는 심드렁했다. 경수에게 필요한 것은 백현의 사죄가 아니었다. 백현이 허릴 굽혀도 빳빳한 A에서 두루뭉술한 C 따위로 제 학점이 추락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 목요일 여섯 시. 소속사 건물 합정에 있는 거 맞죠? 저 근처 살아요.
- 주소 보낼 테니까 참고하세요.
- 저희 발표 주제는 게세르 신화고,
- 검색해보고 오세요. 역할 나눠야 하니까.
- 피피티는 제가 만들겁니다. 저보다 잘 만들기 힘드실 거예요.
연달아 전송된 다섯 통의 문자. 경수는 여전히 카톡을 씹는 유동동 씨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 수업에 흥미도 지식도 없을 백현을 대신해 세 배로 머리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커피 한 모금 여유롭게 들이키질 못했다. 백현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외워야 할 대본 대신에 자꾸만 경수의 당돌한 문자가 아른거렸다. 연기 외의 다른 것에 에너지를 쏟게 되는 상황을, 백현은 끔직이도 혐오했다.
얘가 나랑 놀고 싶은가. 난 대학생 흉내 낼 시간 없는데.
목요일 아침. 백현은 첫 대본리딩에 참석했다. <상습 사랑 구간>은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전형적인 클리셰로 떡칠이 된 작품이었다. 백현은 서브 남주를 꿰찼다. 벽에 밀치며 사랑을 고백하고 건건이 억울한 상황에 몰려 곤욕을 치르는 주인공들은 아무리 읽어도 흥미가 안 갔다. 백현이 열연하게 될 캐릭터는 좀 묘했다. 앞뒤를 분간하기 어려운 역할이었다. 작가의 역량부족인지 치밀한 설계인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었지만 백현은 자신있었다. 쪼가리 대본에도 맛깔나게 카메라를 씹어먹을 자신.
“백현 씨, 느낌 좋은데. 뭐라고 해야 하지.”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감독님 의견이 저한테는 제일 중요합니다.”
“백현 씨라면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부분을.”
“이 장면 정말 중요하거든. 백현 씨 역할이 하는 사랑이 좀 맹목적이고 애틋하잖아? 그 근거가 이 씬 이니까. 뭐랄까 백현 씨는, 영혼을 완전히 뺏긴 게 아니라, 혹시 몰라 반은 남겨둔 거 같애. 자기 자신을 완전히 걸었다는 느낌이 확 안 오네.”
“…”
“그런 적 없어? 누군가를 보는데 갑자기 가슴 속에 10차선 길이 확 트이는거야. 새빨간 스포츠카가 한 대 딱 나와. 그리곤 그 위를 막 질주하는거지. 시속 200km 정도로.”
연극을 즐겨 본다는 감독은 제스쳐가 컸다. 백현은 청바지를 울리는 진동에 잠시 양해를 구했다.
-오늘 여섯시입니다. 앞으로 다 빠져도 되니까 오늘만 나오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죠.
-변백현 인성으로…
“저는 과속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어서요.”
“엉?”
“확 들이받고 싶은 사람은 있는데.”
목요일 점심. 백현은 살이 좀 오른 것 같아 샐러드로 점심을 때웠다. 경수는 밥버거에 스프라이트까지 야무지게 해치웠다.
목요일 저녁. 경수는 미리미리 왔고 백현은 미리왔다. 경수는 15분전에 도착해 2분만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다시 2분만에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백현은 5분전에 도착했다. 뻔한 머리통을 찾았다. 그러나 그 나이대의 머리통은 다 뻔했고…한 명의 얼굴이 상당히 튀었다. 백현은 연예인 준비생이겠거니, 테이블을 채운 A4용지는 대본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도톰한 입술이 제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변백현 씨. 여기요.”
백현은 어림짐작했다. 오답을 밀고 나갔다.
“나 아직 낙하산 태울 짬밥 안되는데.”
“네?”
“연예인 준비하는 거 쉬운 일 아니에요.”
경수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잘생긴 얼굴은 실제로 봐도 잘생겼구나. 그런데 내 학점은?
“그야 어렵겠죠.”
“어쩌다 제 번호 알게 되셔서 엮이려는 심정은 알겠어요. 어쨌든 저를 실제로 만나게 됐으니 실패도 아닐 거고. 그래도,”
“…”
“어리잖아요. 가능성도 많고. 이런 방법, 별로 좋지 않아요.”
“저기요.”
“…”
“휴학을 하실 거예요 안 하실 거예요.”
“네?”
“휴학을 하실 거면 확실하게 의사 표명을 해주세요, 좀. 그래야 저도 제 살길을 찾죠. 제가 진짜로 변백현 씨랑 조별 과제를 해야겠어요?”
“…”
“그리고 저는 7급 공무원 할겁니다.”
“아, 그래?”
“연예인은 철밥통 아니잖아요.”
자세가 곧았다.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겠다는 태도가 백현을 자극했다. 백현의 승부욕을 건드리는 요소는 많지 않았다. 백현은 원체 남의 커리어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타입이 아니었다. 겉멋에 찌들어 제 팔자를 꼬는 동료 연예인들을 비웃긴 했지만, 비웃는 데 그쳤다. 특별히 고소할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었다. 백현은 백현이 꿈꾸는 것을 했다. 육감을 토대로 미래를 그렸고 백현의 판단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왜, 이왕 할 거면 1급 공무원 해야지.”
“그건…천천히 노려볼 생각입니다.”
얘 재밌네.
“내가 진짜로 조별과제를 하겠다고 하면?”
“열심히 해주시면 좋지만 굳이 뭐.”
백현은 경수의 생각이 빤히 읽혔다. 니가 잘하겠니, 하고 속으로 코웃음치는 거 다 보이거든.
“나 머리 좋은데.”
“머리 좋은 거랑은 별개예요.”
“주워들은 풍월이 많아서 다방면으로 빠삭하고.”
“말 해봐요. 무슨 분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
“근거 있어요?”
“경수 씨 정말 모르는구나. 나 최근에 박정희 죽이는 영화에도 나왔는데. 역할은 작은데 대사량이 아주. 무작정 외우다가 포기하고 시사 선생 구해서 주마다 레포트 썼어요.”
“…박정희 아역으로 출연하신 거예요?”
“뭐?”
“동안이라 물어봤어요. 저기 근데 저희 수업은 정외과가 아니라 국문과 수업이고.”
“…”
“제 문자 제대로 안 읽으신 것 같아서. 저희 주제는 게세…”
“…”
“욕한 거 아닙니다. 시베리아의 영웅 서사시예요.”
얘 진짜 재밌네.
“하지 뭐, 박정희 아역도 됐는데 게세르가 대수야?"
“…연기는 안 하셔도 되는데요.”
알았어, 알았어, 손사래치는 백현이 웃었다. 예리한 관찰과 연습으로 획득한 연예인 변백현의 미소가 아닌 인간 변백현의 미소였다.
그런 적 없어? 누군가를 보는데 갑자기 가슴 속에 10차선 길이 확 트이는거야. 새빨간 스포츠카가 한 대 딱 나와. 그리곤 그 위를 막 질주하는거지. 시속 200km 정도로.
얜 모닝 끌고 나와서 속도 제한 딱딱 지키다 별안간 감시 카메라에 윙크 할 것 같은데. 아…진짜 웃기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게 생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