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 크리스탈 무드
  • 2020. 4. 2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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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2

     

     

    권고사직을 권유받은 날엔 여의도에 있었다. 쥐색과 보라색이 섞인 머플러를 두른 채였다. 겨울은 마음이 쉽게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전화를 받았다. 구세군도 없는데 종소리가 들렸다. 삶이 아작나는 소리였다. 일 년짜리 계약직으로 뽑아놓고 반년도 안돼 내쫓았다. 연말이라 일이 줄어들었다는 게 이유였다. 일이 없으면 사람도 없다. 사람이 없으면…그냥 없는 거다. 구질구질한 사실을 헤아렸다. 네이버 검색창에 ‘일방적 해고’라고 썼다 지웠다. 신에게 단단히 호구잡힌 게 아닌 이상 인생이 이토록 독선적일 수가 있나 하는 불만이 들기도 전에, 볼 수밖에 없는 것을 봤다. 6mX15m의 대형 LED 광고판. 총 18구좌. 일 130회 노출 보장.

     

     

    배키는 춤추고 있다.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노래도 부른다. 그를 사랑하는 팬은 돈이 많다. 그의 생일은 5월인데 12월에도 여의도 Ifc몰에 광고를 건다. 반짝이는 트리에 각종 오너먼트 대신 배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았다. 열 세 개의 동그란 화면에서 제각기 움직이는 열 세 명의 배키는 모조리 행복해 보인다. 먼데이키즈 노래를 부르며 슬픈 표정을 짓던 배키는 더 이상 없다. 배키의 주종목은 리드미컬한 멜로디컬한 센서티브한 감각적인 미디엄 템포의 노래지만 배키가 부른다면 투박한 발라드가 좋다. 그런 건 나만 알고 있다. 일방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배키도 즐거울까?

     

     

    치사한 물음이었다. 한때 배키는 내가 즐거워서 자기도 즐겁다고 했었다. 구로역에서 여의도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의 구애였다. 버스는 한적했고 우리는 보통의 남자애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밀착하고 있었다. 너 선 것 같아. 킥킥. 우리의 바지는 모두 아무런 변화 없이 판판했지만 그닥 중요하진 않았다. 대낮에 서로를 흥분시킬 수 있는 녀석들. 달뜬 숨. 상기된 뺨. 적나라한 표현이 가장 정확한 진술이었다. 버스는 빠르게 빌딩 숲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왜 도시엔 터널이 없는 걸까. 배키가 불평했다. 몰래 키스도 못하고, 시발.

     

     

    터널을 지난다고 버스가 깜깜해지는 건 아니야.

    그래도 어두워지잖아.

    내 말은,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거지.

    안 보여 줄 건데.

    ….

    이중 삼중 포장해서, 유성 매직으로 적어 둘 거야. 변백현 거, 건들면 뒤짐.

     

     

    나를 숨겨두려던 배키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내 삶은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지워질 것처럼 흐릿했다. 아침마다 머플러를 매는 데 애를 먹었고, 하루에 한 번은 사이비를 만났다. 작은 불행이 도처에 널려있어 늘 몸을 사렸다. 배키와 버스로 가던 길을 똑같이 버스로 다녔다. 배키는 없었다. 배키는 돈 많은 팬이 있으니까. 실물 대신 최신식의 광고 패널이 그를 위해 준비돼 있으니까. 현란하게 깜빡이는 노스 미디어 타워를 볼 때마다 억울함이 치솟았다. 나를 감춘다고만 했지 본인이 나선다는 말은 없었는데. 배키가 명예욕이 있는 타입이었던가? 골몰해 봐도 쉽지 않았다. 노래를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무대에 올라가면 모두를 웃겨보겠다며 성대모사만 선보이던 배키였다. 한 시간 짜리 제주도행 비행기에도 힘들다며 징징대는 것을 달래주던 기억이 선한데, 현재의 배키는 방긋거리며 해외 곳곳을 잘도 다녔다. (심지어 항공사 모델까지 하고 있었다.)

     

     

    저스틴 비버를 좋아한다던 원어민 선생은 첫 수업에 영어 이름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아디다스 헤어밴드로 꽉 묶은 똥머리가 앙증맞았다. 제임스. 크리스. 왓더퍽. 들어봄 직한 영어 이름을 나열하며 폭소했다. 시간이 다 돼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 배키였다. 원어민 선생의 이름에 있는 ‘키’를 무단으로 도용했다. 난 배키로 할래. 비키는 비키, 배키는 배키. 변키도 백키도 현키도 이상했는데 용케 귀여운 호칭이 탄생했다. 경수는 도키도키? 끔찍한 명명에 경악했다.

     

     

    여러모로 귀여웠다. 날 좋아하는 마음도 귀여웠다. 허벅지를 함부로 더듬거나 뺨을 붙이고 속삭이는 건 결코 귀여운 마음이 아니었지만…또래 애들이 하는 짓에 비하면 소박했다. 호시절이었다. 탁 트인 다리를 지나 가까워지는 빌딩을 보면 이유 없는 긍정이 샘솟았다. 나도 배키도 뭐든지 될 수 있으리란 상상. 나도 뭐든지 되고 배키도 뭐든지 되면 우리 둘을 붙여놔도 뭐든지 될 수 있으리란 상상. 나는 실패했고 배키는 스타가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협박할 걸.

    방송 출연 금지. 유튜브 찬조 출연도 일일이 허락 맡을 것.

     

     

    한 바퀴 풀린 머플러를 내버려 두었다. 11분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서울의 도로는 매번 공사중이었다. 삐뚜름한 임시 도로를 지나갈 때마다 버스가 덜컹거렸다. 옆에 선 여학생이 무게 중심을 놓치고 내 쪽으로 쓰러졌다. 기막힌 우연. 여학생의 몸집만한 백팩에는 배키의 사진이 들어간 열쇠고리가 걸려 있었다. 경쾌한 소리가 싫었다. 서울이 싫었다. 미련하게 넓은 것도 싫었고 별의별 인간이 다 모인지라 배키를 좋아하는 여고생도 무리 없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특히나) 싫었다.

     

     

    “배키 좋아해요?”

    “…네? 네.”

    “난 별로던데.”

    “…”

    “방송에서 왜 그렇게 순진한 척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면서.”

     

     

    첫 키스를 물어보는 심야 방송에서 배키는 스무 살 이후라고 답했다. 내 혀를 씹어먹을 기세로 달려들던 게 열여덟이었다. 틈만 나면 교복 셔츠 밑을 헤집던 게 열아홉이고.

     

     

    배키는 잘만 웃었다. 원래도 웃음이 헤펐지만 카메라 앞에선 정도가 지나쳤다. 십대의 유치한 기억은 모조리 지워버렸다는 듯 웃는 배키를 볼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전 애인의 안녕을 빌어주는 성숙한 어른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바람 빠진 속내를 눈치챈 사장님들은 오늘도 나를 잘랐다.

     

     

    배키가 즐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닳고 닳은 소망만 남은 겨울.

     

     

    이브의 이브가 지나가고 있었다.

     

     

     

    D-1

     

     

    「12.25 11pm, 크리스/ 탈무드를 안다면.」

     

     

    이브날 아침엔 문자를 받았다. 이불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외롭고 불편한 자세였다. 이렇게 허리를 구부려야만 잠이 왔고 쉽게 깨지 못했다. 느지막히 일어나 거울을 봤다. 핸드폰을 돌멩이처럼 쥔 내가 보였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안다면-의 다음 내용일까봐 황급히 잠금을 해제했지만 어제부로 전 직장이 된 회사 동료의 비보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침부터 조조로 영화를 보다 구안와사가 와 그 자리에서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했다. 빨간날이라고 곳곳에서 난리였다.

     

     

    배키가 연락을 정말로 하고.

     

     

    내가 배알이 없는 걸까,

     

     

    종종 고민은 했다. 배키는 내게 그만 어울리자고 말했다. 대형 소속사의 연습생이 됐다며 설레어 한 지 일주일이 안 된 시점이었다. 골격이 잡히지 않은 어깨가 그날따라 왜소해보였다. 배키가 작아지고 나는 쪼그라들었다. 일생 모범생 타이틀을 사수한 내게 배키가 씌운 불건전한 낙인들.따지고 싶었다. 우리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어. 대신 딸도 쳐주는 애들도 있는데 우리가 뭘 어쨌다고. 언제는 불 꺼진 곳만 찾아다니자며. 학교 창문마다 두꺼운 벨벳 커튼이 달려있음 좋겠다고 한 건 너야.

     

     

    배키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배키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옵션 중 내 가치가 가장 낮을 수도 있지. 배키의 가족이나 꿈보다 내가 더 우선순위인 건 나로서도 부담이니까. 난 열여덟에 배키를 만나서 인간이 갖출 만한 웬만한 태도는 다 뒤집혔지만 배키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난 머리만 좋지 사랑은 잘 모르니까. 그런 면에서 배키는 나보다 능숙하니까…이런 것쯤은 한철 추억에 지나지 않고 난 배키의 예전 여자친구들이 그랬듯 배키의 역사가 되려나. 아, 그런데 한낱 사람이 어떻게 역사가 된단 말이야.

     

     

    그러면 나랑 섹스해.

    뭐?

    확실하게 끝을 내야지.

    섹스가 끝이야. 너한테는?

    그런 건 아니고.

    미련이 좀 줄 것 같아서.

     

     

    배키에게 화를 낸 거였다. 닭처럼 생긴 비둘기가 여럿 모여있다가 제각기 흩어졌다. 앞서 걷던 여자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음박질쳤다. 나와 배키만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배키는 내가 허락하는 만큼만 날 함부로 다뤘다. 진도라는 말을 굳이 쓰자면 우리는 키스에 멈춰있었다. 키스를 함부로 하는 단계였다. 입술을 마구 깨물고 서로의 침을 반복해 삼켰다. 배키는 어울리지 말자고 했지 헤어지잔 말은 안 꺼냈다. 애매한 화법이 거슬렸다. 충격 요법이었다. 너 어디 한 번 말해봐. 나랑 한번 하고 관둘거야?

     

     

    3교시 쉬는 시간에 싸웠고 답은 점심 시간 후에 들었다. 배부르고 따뜻해 늘어지려던 몸이 배키 덕에 빳빳하게 굳었다.

     

     

    그러면, 거기서 만나.

    …어디?

    크리스 탈무드.

    나 거기 어딘지 몰라.

    왜 몰라, 우리 맨날 버스 탈 때마다 지나가잖아.

    버스 탈 때 보는 건물만 수십 개야.

    구로역에 있는 거.

    구로역?

    호박 나이트 같은 거 있잖아. 엄청 낡은 간판.

    모르겠어.

    크리스는 노란색이고 탈무드는 파란색. 부채꼴 모양이고. 글자 크기가 커서 더 못생겨 보인다며.

    내가 그렇게 말했어?

    나는 아니니까.

    나는 아니야, 경수야.

     

     

    그때 떠올린 생각이 열 개쯤 되었다.

     

     

    1. 사실 어디인지 안다. 그 간판은 정말로 흉측하다.

    2. ‘크리스탈’이 노란색이고 ‘무드’가 파란색이다. 배키는 저번에도 크리스탈/무드를 크리스/탈무드로 읽었다. 크리스 탈무드가 뭐야?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고쳐주려다 웃겨서 그걸 그렇게 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며 한 마디했다. 퇴근 시간과 겹쳐 정체 구간이 길어졌다. 배키가 졸기 시작했다. 배키는 시끄러운 버스에서 깨우면 안 될 것처럼 곤히 자는 법을 익힌 지 오래였다. 마치 시끄러운 버스가 잘못된 거고 열심히 자는 배키가 옳은 것처럼. 시몬스 침대에서 잘 자고 있는 사람을 납치해 버스에 데려다 둔 것처럼 자는 배키를 나는 절대로 건들 수 없었고…크리스/ 탈무드가 진짜 웃기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도 싫고 탈무드도 싫지만.

     

     

    몰래 키스를 하다가 크리스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크리스는 비키와 같이 학교에 부임한 원어민 선생이었다. 한식만 먹는 것 같은데 삼시세끼를 인앤아웃으로 때운 사람처럼 덩치가 상당했고 아닌 척 하면서 우릴 미개한 옐로우 몽키쯤으로 여기는 구석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피자보다 된장찌개가 좋다고 했다가 거짓말치면 안된다며 혼났다.) 배키의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학교 커튼은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통 두 개 붙어있는 실루엣이 그렇게 음란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소리가 좀 그랬나? 우리가 오래 헐떡였나? 배키는 크리스 간이 조막만 해서 이르진 못할 거라고 했고 난 한국어로 된 유려한 변명을 여러 개 만들어 두었다. 개중엔 좀 허접한 것도 있었다. 크리스 쌤이 미국에서 와서 상상력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저흰 젤리를…뜯어 먹고 있었거든요. 손에 묻으면 끈적거리니까 그냥 입으로 가져가라고 했을 뿐이에요.

     

     

    사달이 날 것을 대비해 등교 시간을 앞당겼다. 교장이 교실에 들어닥쳐도 차분하게 대꾸하고 싶었다. 일주일이나 긴장을 유지했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크리스 쌤도 게이일 수 있겠다.

     

     

    내 억측에 배키는 웃지 않았다.

     

     

    쭉 웃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자자고 할 때도. 위치를 모른다는 내게 호박 나이트를 빗대 설명할 때에도.

     

    3. 배키만 벌을 받았나.

    4. 그럼 받은 벌을 나누어 가지면 되지 왜 그만 어울리자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까.

    5. 헛소리에 헛소리로 대꾸했더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질 않나.

    6. 얘 정말 나랑 끝을 낼 생각인가.

    7. 이 와중에도 크리스/탈무드네. 진짜 웃기다.

    8. 안 웃기다.

    9. 탈무드는 동성애를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간주한다고 들었다. 동성애자 가족을 둔 다큐를 보고 있던 엄마가 꺼낸 말이었다. 엄마는 모욕을 주기 위해 티비를 시청하는 사람이었다. 사자성어 하나도 못 맞추는 개그맨들. 가산을 탕진 한 것도 모자라 빚까지 내 허황된 꿈에 달려드는 사람들. 엄마는 그들을 속되게 흉봤다. 동성애자도 그런 범주일 줄은 몰랐지만…탈무드 구절까지 외우는 줄은 몰랐지만…할 말은 해야했다. 탈무드가 뭔데 용서를 논해? 다른 거에 비하면 한참 작잖아. 기독교도 아니고 탈무드라니 좀 그렇다. 엄마 역시 웃지 않았다. 아들의 비행을 필연적으로 눈치채는 엄마의 눈. 다만 나는 비행이 아닌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10. 크리스도 조용하고 엄마도 조용한데 배키만 시끄러운 게 너무도 수상한데 배키 얘는 왜 그런 말은 않고, 아니라는 말만 하고 있을까.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날짜와 시간을 정했다. 버스로 같이 가면 되잖아? 내가 묻자 배키는 따로 도착하고 싶다고 했다. 콘돔 사오려고 그러는구나. 마지막 농담이었다.

     

     

    나는 시간에 맞춰서 갔고 배키는 오지 않았다. 오지 못한 건가? 궁금했지만 해결은 안 났다. 대한민국에서 나와 배키의 자초지종은 별 쓸모가 없었다. 배키는 데뷔를 했고 화면발을 잘 받았다. 신인일 때 신인상을 탔고 신인을 벗어나자 우수상을 탔다. 상 이름이 바뀌어도 상을 타는 사람은 배키였다. 연말마다 입김을 내뿜으며 레드카펫을 밟았다. 수상 소감엔 내가 모르는 배키의 지인이 끝도 없이 나열됐다. 배키의 세계는 넓어지고 내 세계는 곤궁해졌다. 배키가 플러스라면 나는 마이너스였다. 달라붙을 게 분명한 성질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 아쉬운 점은 배키가 춤과 노래에 모두 능숙해졌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땐 내가 춤을 더 잘 췄던 것 같은데…특별 무대랍시고 한층 화려하게 차려입은 배키를 보는 게 내 연말이었다. 연말이었는데.

     

     

    「배키 씨는 올해 연말도 정신없으시죠?」

    「다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그렇죠, 뭐.」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스케줄 있으실 것 같아요.」

    「….」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만나줄지 모르겠어요.」

    「배키 씨가 보고싶은 사람도 있어요?」

    「몇 없죠.」

    「누군지 정말 궁금하네요.」

     

    「만나게 되면 정말 오랜만이라.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 데 보면 그대로인 경우도 많고. 다들 십 년전에 듣던 노래 아직도 듣고…」

     

     

    「그러니까…안 변했으면 좋겠어요, 제발.」

     

     

     

    D

     

     

    여의도에서 구로를 지나는 길은 응당 그래야만 서울의 크리스마스라는 듯 빈틈없이 막혀 있었다. 버스 기사는 욕먹을 게 뻔한 운전을 했다. 깜빡이도 안 켜고 대가리부터 들이밀고 보았다. 배차 간격을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인터뷰를 본 적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나날이 궁핍해져서 남의 사정 같은 건 잘 신경을 못 썼다. 아이 러브 유를 차용한 아이 서울 유를 실천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껴 쓴 마음을 기념일에야 겨우 꺼내놓았다. 근사한 식당에 예약을 해두거나 형형색색의 led 전구를 달아 놓은 거대한 트리를 보러 가는 숱한 사람들이 오늘은 부럽지 않았다. 마음이라면 나도 오래도록 쟁여두었다.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크리스 탈무드/는 철거 되었다.

     

     

    사라져야 마땅할 것들의 허들이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고, 사람들의 마음이 얄팍해지는 것처럼, 건물 하나 부수는 게 너무 쉬워지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어울리지 않는 차를 목격했다. /크리스 탈무드/가 있던 자리 옆의 샛길이었다. 건물은 없어도 좌표는 있었다. 배키는 운전도 잘 하네. 그러고 보니 예능 프로그램에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걸 몇 번 봤던 것 같았다.

     

    「다들 십 년전에 듣던 노래 아직도 듣고…」

     

    배키가 처음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그가 나를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나는 스타(그때는 아직 스타가 아니었지만)와 친구가 함께 등장하는 예능프로그램을 죄 예의주시했다. 배키가 출연하는 프로는 대체로 흥했고 바쁜 스케쥴 사이에서도 틈틈이 동갑내기 친구들을 사귀어 기사화되곤 했다. 나는 기사화될 건덕지도 없고 같은 원숭이띠도 아니고 사실 친구는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이 배키를 떠올릴 때 당연히 나는 그 영역에 없겠지만 때로는 그 사실이 사무치게 섭섭했다.

     

     

    배키는 나를 아주 좋아한 건 아니었나봐. (난 그랬는데.)

     

     

    스무 살 초반에는 허풍을 쳤다. 공상하는 대로 뱉었다. 사실 내가 변백, 까지 말하고 엎어졌다. 먹던 소주잔을 이유 없이 떨어뜨려 깨뜨리곤 했다. 자그마한 술집 텔레비전에 배키의 광고가 나올 때면 벌어지는 사고였다. 개자식. 의리 없는 새끼. 마주치기만 해봐라. 된 소리의 주인공은 전부 배키였다. 마주치기만 해봐라, 해봐라, 하면서 만남을 고대했다.

     

     

    스물 다섯 살엔 본가에서 김장을 도왔다. 신문지를 깔고 배추 속을 채웠다. 배춧잎이 작아서 만들어둔 소가 남았다. 김장한 날엔 수육을 먹는 거라는 엄마의 말에 근처 보쌈집에 수육을 주문하려던 때였다. 배키가 고정 출연 중인 주말 예능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배키가 조연으로 열연한 드라마가 시청률 40%를 돌파했다며 패널들이 박수쳤다. 예능 프로그램 특유의, 오바와 주접을 겸비한 자막이 깔렸다. 엄마는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쟤랑 아직도 연락하니. 아니. 그럼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너 그때 잠깐 이상했잖아. 엄마가 쟤한테 알아듣게 설명했어. 뭘 알아듣게 설명해?

     

     

    엄마가 어떻게 열아홉을 이길 수 있어?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추고 말빨도 좋고 머리마저 비범한 걔를…엄마가 무엇으로.

     

     

    전화를 끊었다. 수육은 시키지 못했다. 배추김치는 간이 덜 배어 싱거웠고 무생채는 무가 썼다.

     

     

    스물 여덟은 변함없었다. 배키의 인기처럼.

     

     

    까맣게 썬탠 된 차창을 두드렸다. 

     

     

    배키야, 놀라지 마. 네 차 아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너에 대한 웬만한 찌라시도 내가 더 많이 알 걸. 되도 않게 널 질투하는 댓글에 비호감 하나씩 꼭꼭 누르는게 내 하루 루틴이야. 시간이 남아 도냐고? 걱정하지 마. 직장에서 짤렸거든. 시간이 많이 남으니 언제라도 날 보러와줘. 너는 바쁘잖아. 난 네가 바빠도 오기만 하면 돼. 여의도 한복판에서 웃는 배키는 이제 지겨워.

     

     

    “변백현.”

    “…”

    “백현아.”

     

     

    창 대신 문이 열렸다. 뒷통수가 붙잡혔다. 배키는 여전히 키스를 함부로 하는 법에 빠삭했다. 다리가 풀리고 혼이 빠지는 키스 말이다. 더한 걸 알게 되어도 키스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하게 되는 그런 키스를. 크리스탈 무드가 있었다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곳이 모텔이었던가? 잘 모르겠지만, 배키가 호박 나이트에 비유했고 내가 보기에도 80년대의 촌스러운 모텔 간판 같았는데.

     

     

    “다른 생각 하지 마.”

     

     

     

    그렇지. 알 바 아니지.

     

    너랑 앞으로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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