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버스 세계관
*오세훈
짧은 말이 좋았다. 속도가 빠른 노래를 즐겨 들었다. 드러머를 꿈꾼 적이 있었다. 단문을 주로 썼다. 직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뭉스러운 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서울 게 없다고 거만 떨었지만 까보면 겁쟁이었다. 솔직한 사람들은 길게 말한다. 반복해서 말한다. 속마음이란 건 아무리 꾸며도 네모반듯한 모양새는 못되고 어딘가 구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걸 촌스럽다고 기피했다. 툭 던지고 말았다. 힌트랍시고 거들먹거렸다.
맞추는 사람이 있어야 문제가 된다.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 숱한 힌트들.
나만 아는 걸 답이라고 부를 순 없겠지.
틀린 조각을 이곳에 기록해 둔다.
<개미와 고래>
개미를 본 날을 기억한다.
엄마 손을 잡고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들은 난폭했다. 차라면 다 좋을 나이였다. 책에서 본 소리를 따라 했다. 앙증맞은 의성어를 남발했다. 엄마가 조심하라며 나를 보살폈고 난 건너편의 아저씨를 봤다. 환상이라면 다 좋을 나이였다. 대뜸 소리질렀다. 저기 개미 보이냐고. 진짜 크다고. 까맣고 둥그스름한 개미를 이고 다니는 아저씨였다. 공룡엔 빠삭했어도 개미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개미는 개미. 여왕개미는 아닐 테니까 일개미. 나날이 덩치와 허세를 부풀리는 보통의 아이다운 결론이었다.
파란 불엔 건너지 못했다. 개미 아저씨한테 붙잡혔다. 엄마가 검도 배우라고 할 때 배울걸. 두툼한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있는 힘껏 깨물어도 소용없었다. 짙은 쥐색의 코트를 입은 아저씨가 걸을 때마다 누리끼리한-가까이서 보니 완전히 검은색도 아니었고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빛깔의 개미가 싸구려 전단지처럼 고꾸라졌다. 개미가 싫어졌다. 난 한 번 싫으면 두 번 세 번 싫었다. 아는 욕을 총동원했다. 욕만 배운 외국인처럼 뜻도 모르면서 지껄였다. 개미 아저씨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그저 나를 열심히 운반했다.
개미 아저씨가 날 데리고 도착한 곳은 실험실이었다. 외투를 벗고 가운을 입어도 개미는 그대로였다. 한 차원 너머의 물질처럼 느껴졌다. (신기했지만 신기하다는 말을 참았다. 어린 마음을 감추려 힘썼다. 고작 엄마 잃어버리고 우는 애면서 말이다.) 개미 아저씨의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오성욱. 왜 나랑 성이 같지? 엄마가 진을 빼는 내 까탈스러움으로 개미 아저씨의 혼을 빼놓고 도망…쳐야겠다는 초등학생 치고는 꽤나 건설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오성욱은 어른이면서 어린이를 협박했다. 봐주지 않았다. 나는 핸디캡 없이 맨몸으로 오성욱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지는 게 당연했다. 내가 진다는 걸 오성욱도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개미라며. 저 아저씨는 뭐야?”
“…파래요.”
“파래?”
“짠 맛 나는 거 몰라요?”
“아저씨 개미가 크니. 아니면 저 아저씨 파래가 크니?”
“…개미가 더 커서 이상해요.”
온갖 동식물을 나열했다. 실험실에 있는 모두가 저마다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더는 신기하지 않았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개미나 해초가 사람을 먹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애초에 몸 만한 개미나 해초를 이고 다니는 얘기도 들어본 적은 없었다. 불길한 상상이 엄습했다. 실험실의 테이블 개수를 셌다. 무기로 쓸만한 것을 찾았다. 재밌게 본 학습만화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나 만한 어린애가 어른을 무찌르고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의 주목을 받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엄마, 나 오세훈이야. 무슨 일이 있겠어? 만화 속 주인공처럼 호기롭게 중얼거렸다. 작은 눈동자를 열심히 굴렸다. 들어오는 문이 있으면 나가는 문도 있겠지.
들어오고 끝났다. 눈 감고도 실험실을 그릴 수 있고 오성욱의 개미를 그릴 수 있고 현진 아저씨의 파래를 그릴 수 있지만, 엄마는 그리기가 어렵다. 한 번 사는 인생 쉽게 살고 싶었는데 길목마다 고난이었다. 엄마, 나 오세훈이야. 그 말을 이제는 용감하게 할 수 없고.
나는 센티넬과 가이드가 가진 힘의 파장을 여러 형상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개미나 파래 따위의 것들. 색깔은 죄 거무튀튀했다. 나중에 가선 모양을 따져보는 일도 귀찮았다. 센터에 있는 모두가 거뭇한 짐을 등에 매달고 다니는 걸 보면 토기가 몰려오기도 했다. 사람들의 능력이 아닌, 죽음을 엿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굽은 등으로 센터를 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말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 오성욱은 내게 죽은 센티넬에게선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몸에서 무지개가 튀어 나오던데요. 마구잡이로 거짓말했다. 오성욱은 아직까지 뻗대는 거냐며 코웃음쳤다.
오성욱은 줄을 잘 섰다. 싸바싸바 못할 것 같은 얼굴로 굽신거리면 윗사람들이 껌뻑 죽었다. 오성욱은 말도 잘했다. 번지르르한 말들. 돈 냄새 나는 말들. 미래나 혁신같은 걸 포함한 말들. (오성욱은 미래인류연구학회의 소장이다.) 허술한 논리를 말발과 처세로 때웠다. 타이틀로 먹고 살았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기억 관련 센티넬. 오성욱도 알았겠지만, 개미만한 능력이었다. 시기를 잘 타고 났다. 한창 센터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닐 때쯤 기억 관련 센티넬이 여럿 발견됐는데, 오성욱보다 뛰어났음에도 오성욱만큼 설치진 못했다. 오성욱은 이미 발이 넓었고 기대에 힘입어 비밀스러운 사업을 시작한 참이었다. 기억은 오성욱의 주된 업무가 아니었다.
오성욱의 삶을 지배하고
나와 도경수를 센터에 묶어둔,
네 글자.
미래 인류.
오성욱은 센티넬을 신뢰하지 않았다. 본인도 센티넬이면서 그랬다. 덜 떨어진 개체로 여겼다. 혼자서는 생존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듣기로는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걸 수치스러워해 본인이 가이딩 받는 모습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고 했다. 가진 건 자존심 뿐인 양반이니 가이딩 받을 때마다 이를 박박 갈았을 게 훤했다. 그의 아집과 열등감, 세치 혀가 만나 탄생한 대대적인 미래 인류 사업의 배경은 대강 그랬다. 가이드가 필요없는 센티넬을 찾자. 만들자. 만들어 대량으로 복제하자.
센티넬은 과학적 발명품이 아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돌연변이였고 오성욱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는 센티넬보다 한참 후에 발견되었다. 폭주를 일삼는 하급 센티넬들의 숱한 죽음 뒤에 나타난 기적적인 치료제였다. 오성욱은 여기서 힌트를 찾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오성욱의 기준에서, 가이드는 센티넬보다 진일보한 존재였다. 인류는 포악스러운 진화를 거듭하기 마련이었다. 센티넬로 태어난 사람이 가이드 능력까지 갖추게 되는 일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오성욱이 날 데리고 돌아다니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가이드는 센티넬보다 숨어있기 쉬웠다. 센티넬을 판별해 내는 기계가 날로 정교해질 때, 가이드는 곳곳에서 오류가 났다. 넘치는 힘을 자제하지 못하는 센티넬이 필연적으로 발견될 때, 가이드는 주변에 센티넬이 있지 않은 이상 일반인들 사이에 무리없이 섞여 살아가기 마련이었다. 다만 내게는 보였다. 같은 진회색-흑색의 파장이어도 움직임이 달랐다. 갯벌에 빠진 것처럼 둔하고 꾸물거리는 모양새를 가진 파장이 가이드의 것이었다. 오성욱은 다정히 물었다. 보이는 대로 말해볼래? 처음엔 순순히 답했다. 답해주면 순순히 돌려 보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 달에 걸쳐 두 명을 찾아냈다. 한 명은 가이드, 한 명은 센티넬이었다. 내 예상과 일치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 오성욱은 흥분했다. 내 머리를 힘주어 헝클였다. 헤집어진 머리칼을 다듬을 새도 없이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세훈이 네가 큰일을 할 거란다. 엄청난 일을 하게 될 거야. 영웅이지. 영웅? 알겠니. 큰일도 영웅도 좋았지만 엄마가 더 보고 싶었다. 짧고 굵은 게 좋은 것 같다는 내게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던 엄마. 보고 싶다는 말을 하면 정말로 보고 싶어지니까 참았는데. 한계였다. 집에 보내줘요.
이상한 곳이라는 건 진즉에 알았다. 동화에서도 본 적 없는 곳이었다. 꿈이라면 너무 오래 꾸고 있었다. 집? 오성욱의 입매가 비틀렸다. 개미가…다리를 떨었다. 이제 여기가 너네 집이야. 싫어요. 싫다고? 네, 싫어요. 왜 싫어? 집이 아니니까요. 집이라니까. 이게 무슨 집이에요. 엄마도 없고, 친구들도 없고, 제 베개도 없고, 소파도 없고, 티비도 없고…. 없는 것을 날 새도록 늘어놓을 수 있었다. 집이 아닌 이유를 그렇게나 많이 댈 수 있었다. 오성욱은 첫 만남 때처럼 날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최소한의 배려마저 베풀지 않았다. 섬뜩하게 명령했다. 내가 집이라면 집이지. 감옥이라면 감옥이고. 감옥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
엄마가 없는 건요? 전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안 보게 해주면…얘기 안 할 거예요.
뭘?
시키는 건 다요.
협상 중이라고 착각했다. 어른이란 자고로 어린아이를 이겨 먹는 비겁한 방법이란 방법은 모조리 통달한 상태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주연정. 엄마 이름 맞지?
…아니에요.
이젠 엄마 이름도 아니라고 하네.
…
연정이가 네 얘길 한 적이 없어.
…
알았으면 바로 찾으러 갔을 텐데. 내 자식이 엄청난 인재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거짓말.
연정이는 아직도 카레를 잘하니?
…
아빠는 사랑하는 아들을 때리고 싶지 않단다.
엄마는 카레를 잘했다. 당근과 감자의 크기가 일정했다. 기분에 따라 토마토나 옥수수 콘을 골라 넣었다. 맵기가 적당했다. 엄마와 나는 여태껏 아빠 없이도 잘 먹고 잘 살아왔다. 그러니 갑자기 등장한 아빠 따위 반가울 리 없었다. 그랬는데도. 친구들이 너희 아빠는 어디 갔냐고 장난스레 물어볼 때마다 아빠는 있어봤자 별로인 것 같다고 너스레 떨었음에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그것도 아빠가, 있다는 사실에.
내가 오성욱보다 큰 키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럼 괜한 애틋함 같은 건 집어 치우고 그 자리에서 오성욱을 밀어 버렸을 텐데.
아빠도 곤란해. 어떡하니. 네가 엄청난 능력을 가져버린 걸. 세훈아.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란다. 네가 인류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되는 지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아마 너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거다. 아빠도 오래 붙잡아 두려는 건 아니야. 지금처럼 말만 해주면 돼. 뭐가 보이는지. 센티넬은 누구고 가이드는 누구인지. 특이한 사람은 없는지. 이를테면 파장에 색깔이 있다던가….
협박과 구슬림이 날 깔아뭉갰다.
현진 아저씨가 날 감시했다. 몇 명만 더 찾아내면 될 거야. 어설프게 위로했다. 몇 명은 늘 몇 명이었다. 줄어들지 않는 숫자 앞에서 무력해졌다. 반항한답시고 입을 다물면 오성욱은 영원히 그러고 있으라며 비아냥거렸다. 보통의 센티넬이나 가이드(보통이란 말이 우습지만 말이다.)를 찾는 게 아니란 건 쉽게 눈치챘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가진 파형이 다르듯, 미래 인류도 그 파형이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내 임무는 오성욱의 가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헛짓거리라고 생각했다. 천편일률의 검정은 번번이 오성욱을 좌절시켰다. 어느 날은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게 맞냐며 내 멱살을 잡기도 했다. 특이한 놈을 찾아내면 놔줄게. 엄마도 보게 해줄게. 치사한 회유에 속이 헐었다. 진짜로요? 하고 묻는 내 처지가 서글펐다. 그럼 진짜지, 아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니.
속아 주었다. 반쯤 믿었다. 속는 것과 믿는 것은 비슷했다.
내내 혼자였다. 한낮에도 혼자였다. 유일하게 센터 밖 출입이 허용된 아이였지만 배로 괴로웠다. 저 누나 센티넬이에요. 쟨 가이드. 시시껄렁하게 읋었다. 개미를 보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짓거리만 없어도 성공한 삶이라는 걸 몸소 배웠다.
바깥에 나갈 때면 몰래 주머니에 눈을 쑤셔 넣던 겨울에.
쟤 뭐지.
응?
쟤요.
…어떻게 보이는데?
현진 아저씨의 흥분한 목소리는 괴기스러웠다.
분홍색인데?
분홍색?
분홍색 돌고래예요.
돌고래를 본 날을 잊지 않는다. 개미는 기억하고 돌고래는 잊지 않는다. 오성욱과 오세훈은 기억하고 도경수는 잊지 않는다. 인생이 그사이 어딘가 처박혀있다.
<좋은 것은 반드시>
좋은 것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엄마의 지론이었다. 내가 겪은 일을 나눠보았다.
아빠를 만나고 센터에 갇혔다. (대가가 너무 크다. 아빠를 만난 건 썩 좋지도 않았다.)
능력을 가졌고 영웅이 됐다. (과연 영웅이 되었을까? 아닌 것 같다. 능력은 거추장스럽다.)
도경수를 만났고.
다음 문장을 적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도경수에겐 내가 아빠다. 내가 센터고. 나 때문에 인생을 그르친 애를 내가 추억한답시고 나댈 순 없다. 대가는 내가 아니라 걔가 치르고 있다. 떠넘긴 대가 앞에서 오늘도 숙연해진다.
<경수>
분홍돌고래는 (내 고발로) 끌려왔다. 가까이서 보니 딸기 우유에 가까운 연한 핑크빛이었고 꼬리가 갈라진 모양이 뭉툭했다. 갈라진 게 아니라 넓게 퍼져있다고 봐야 맞았다. 선이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했는데 그건 그 애의 얼굴 모양을 연상시켰다. 분홍돌고래가 입을 열었다. 안이 붉었다.
내 이름 알아?
…모르지.
아까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말해주고 갔어. 다 잊을 거래. 나를.
…
너도 그래?
아닐걸.
내 이름은 도경수야.
그래, 도경수. 이름 멋있네.
넌?
난….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본 건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나는 내 선택으로 센티넬 혹은 가이드로 판명된 인간들이 센터에 갇힐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저릿하게 감각하진 않았다. (피했다고 봐야 옳았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는 착하게 굴기 어려웠다.) 이름을 말하기가 좀 그랬다. 좀 그렇다는 것. 겸연쩍다는 것. 돌고래는 영리한 동물이라는 데 얜 왜 이렇게 체념이 빠를까? 신경질도 내고 센터를 뛰쳐나가겠다고(실패하겠지만) 지랄도 좀 하고, 그래야 마땅하지 않나? 내 살길 바빠 제쳐둔 마음을 오롯이 그 애 에게 쏟았다. 처지가 형편없어 남 걱정할 만한 신세는 아니었는데도 왈칵 짜증이 났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
응?
내 이름 같은 거 하나도 안 중요해.
…
멍청하면 끽이다, 여기선.
오성욱은 도경수가 그동안 찾던 미래 인류라고 확신했다. 끈덕진 눈동자가 도경수를 훑었다. 경수 찰 차려 입었구나. 억지로 다정한 목소리를 만드느라 기침이 잦았다. 도경수를 천천히 검사실로 밀어 넣었다. 센티넬 검사가 먼저였다. 플라스틱 안의 화살표가 제 자리에서 잠깐 진동하다 멈췄다. 몇 칸은 더 움직여야 D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오성욱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제 자리에서 목을 돌리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바로 가이드 검사가 진행됐다.
화살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경수의 성적표는 처참했다. D에도 미치지 못하는… 센티넬이 아닌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데리고 뭔가를 해볼 순 없는, 센터에서 가장 처치가 곤란한 부류. 그날 저녁엔 오성욱에게 뺨을 맞았다. 오성욱이 내 멱살을 쥐고 물었다. 오성욱은 내가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배우를 해보라며 비꽜고 난 억울했다. 배우건 가수건 센터에선 다 못하는데 무슨 개소리야.
내 눈엔 여전히 분홍색 돌고래였다. 제 자리에서 지느러미를 둔하게 흔들었다.
아직 그렇게 보여요.
…
정말이에요. 전 아무 때나 거짓말하지 않아요.
직무가 변경됐다. 돌고래를 찾는 일에서 돌고래를 돌보는 일로.
매일 밤 도경수 관찰일지를 썼다. 과학 시간에도 안 하던 짓을 센터에서 했다.
3월 25일/ 크기 비슷. 여전히 분홍.
6월 11일/ 크기 조금 줄어듬. 그야말로 분홍.
9월 3일/ 크기=(똑같다는 뜻이었다.), P(핑크의 P였다.)
11월 11일/ 크기+(약간 커졌다는 뜻이었다.), 피치 핑크.(맨날 똑같은 분홍이라고 적는 게 지겨워 분홍색 종류를 찾아본 후였다.)
왜 나를 따라다녀?
내가 너를?
응, 지금도.
따라다닐 만 하니까 그러겠지.
다행이네.
…
따라다닐 정도는 돼서.
그 애는 뻔했다.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생겼고. 순정만화 주인공에게 으레 찾아오는 시련도 있었고. 머리카락이 부드러웠고. 속은 몰캉했고…
뻔하지 않은 건 분홍돌고래 뿐인데 그건 나만 볼 수 있었다. 지겨워도 할 일은 할 일이어서 그 애를 기록한 노트는 쌓이고 오성욱은 내 성의없는 기록에 매번 이를 갈았지만, 난 예전보다 그런 오성욱의 비위를 잘 맞춰 주려고 애썼다. 성과 없는 도경수 따윈 그만 쫓아다녀도 된다고 할까 봐 무서워서였다.
<제목 없음>
현진 아저씨가 며칠 째 보이지 않았다. 말 센스가 없고 손바닥이 꺼칠꺼칠했지만 난 오성욱보단 아저씨가 좋았다. 센티넬과 가이드를 찾으러 다닐 때, 센터 안에 있다 밖으로 나오면 날씨가 잘 가늠이 안 돼 여름인데 니트를 입고 겨울인데 반팔티를 입으면 계절에 맞는 옷을 챙겨주던 것도 아저씨였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파래가 시들시들해지긴 했지.
제 발로는 걸어가 본 적 없는 연구소 문을 한참이나 두드렸다.
싸구려 컨테이너처럼 투박한 건물은 언제봐도 못생겼다. 건물에도 자고로 꽁무니가 있어야 한다고 들어오는 문이 있으면 나가는 문이 있고 방이 있으면 창문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센터 건물은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꽁무니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내가 누구냐, 고현진이잖냐. 몰래 쬐그만 퇴로를 갖다놨지…하던 현진 아저씨가 떠올랐다.
-하이데거 동창생이 말했거든.
-하이데거가 누군데요.
-있어, 똑똑한 사람.
-센터는 똑똑하면 싫어하잖아요.
-얌먀, 자기 편 한다고 하면 다 좋아해.
-그래서요.
-어엉?
-뭐라고 했는데요. 동창생이. 근데 하이데거도 아니도 동창생인데 의미가 있나?
-동창생도 똑똑했겠지, 뭐.
-…
-계단을 올라갈 때면 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전체가 올라간다.
-당연한 소리네.
-정신도 올라간다 이거지. 허…넌 어린 애가 왜 이렇게 무드가 없어.
-피치 핑크, 밀키 핑크, 인디언 핑크의 차이가 뭔지 모르죠?
-뭐?
-나한텐 그게 무드예요.
현진 아저씨가 가져다 놓은 붉은색의 계단. 지치고 힘들어지면 괜히 올라가 보며 아, 나는 지금 정신도 업 업(UP UP) 중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리고 “이건 세훈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여기 툭 튀어나온 곳 보이지? 여기 밀면 안은 비밀 상자야. 난 어른이니까 필요 없고 너 써라. 걸리면 안 되는 거 있음 다 갖다 놔.” 하며 선물해 줬던.
두툼한 연구일지를 발견했다. 읽었다. 센터가 유별난 특징이 있는 센티넬과 가이드에게 연구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벌인 끔찍한 짓거리가 적혀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갈아 넣어 미래를 만드는 거였다. 현진 아저씨 역시 실험 대상자였다. 도경수는 예비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
그 애가 작고 연한 분홍돌고래 따위에 그쳐서 고맙고 다행이었고
고맙고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역겹다는 말은 한참 모자랐다.
<개미는>
거울을 봤더니 등에 개미가 있었다. 헛것인가 싶어 손으로 털어냈는데 미동도 없었다. 재수없게도 오성욱의 것을 닮은 개미였다. 센티넬은 보통 폭주하면서 각성하던데. 무슨 능력인지는 몰라도 성가셔졌다는 생각만 들었다.
도경수를 보러 가는 길에 P와 마주쳤다. 어지러웠다. P는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먹었고 마지막 피클은 반만 베어 문 채로 남겼다. 그저께는 동료 E와 함께 훈련실에서 탁구를 쳤다. P는 세 판을 연속으로 졌고 탁구채를 집어 던졌다. 2년 전에는 K와 잠깐 사귀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6년 전에는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쓰러졌고.
P의 기억을 원치 않게 엿보게 됐다. 센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로서는 배로 힘들어진 셈이었다.
얼, 오세훈. 어디 가는 길?
비켜.
도경수 보러 가지?
…
너 걔 되게 좋아하더라.
야.
뭐 도와줄 건 없고?
나랑 도경수 사이를 네가 어떻게 도와줘, 하다가 설핏 궁금해졌다. 기억 관련 센티넬이면 이런 것도 되나? 도경수와 내가 붙어있는 모습을 엉성하게 상상했다. P의 눈을 노려보며 되뇌었다. 마땅한 말이 없어 엉뚱한 주문을 반복했다. 이걸 본 적이 있지? 너 멀리서 보고 호들갑 떨었잖아. 네 기억이 이렇잖아. 꽤 민망한 작업이었다. P는 아까와 같이 웃는 낯이었고 그의 머리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기억의 필름 중 내가 만들어 낸 장면이 보였다. 미친. 되네 이게.
도경수를 기다렸다. 도경수에겐 말하고 싶었다.
도경수는 파란색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얼굴이 환했다. 난데없이 P의 기억을 감당하게 된 것처럼 도경수의 기억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일었다. 현재 시점에서 먼 기억일수록 흐릿했다. 당사자 딴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날만 겨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난 도경수가 가진 매일의 분홍이 다 특별한데 도경수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혹시 변백현 알아?
…
아, 모르는구나.
넌 내가 다 모를 것 같나 봐. 맨날 아냐고 물어보잖아.
그런 건 아니었어.
…나 아는 거 많아.
걔가 나 보더니 울더라.
…
근데 나도 눈물 나는 거 있지.
그래, 그것도 봤어. 궁금하지 않았는데.
<나만 아는 사람>
나만 아는 사람을 나만 알게 된 과정에 대해 말하겠다.
도경수의 고래는 몸집을 키웠다. 변백현과 붙어 다니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가만히 지느러미를 살랑거리는 게 다였던 고래가 크게 꾸물거렸다.
가이드.
가이드의 파장을 닮았다.
가이드의 파장과 같았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일 처리가 기막혔던 현진 아저씨도 당했다.
도경수는 여기 있으면 안 됐다.
마음이 깎여 나갔다.
나는 여기 있어도 되는데 도경수는 안될 것 같아.
왜 그러는데 세훈아 백현이가 기다려.
이 상황에서도 변백현 얘기밖에 안 하는 도경수지만 도경수에게 재잘거릴 수 있는 숨이 붙어만 있어도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었다.
애초에 개미를.
개미를 보지 말 걸.
개미 같은 거 정말로 보지 말 걸. 못 본 체 할 걸.
아아.
후회가 도경수의 고래처럼 비대해졌다.
도경수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도경수는 납득이 안 가면 움직이지 않는 애였는데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풀어 이해시킬 정도의 여유가 없었으므로 힘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현진 아저씨가 남겨둔 것엔 센터의 꽁무니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세훈아 어디 가는 건데 백현이가 기다린다니까 너 눈이 이상해 폭주 온 거 아니야?
도경수는 계속 고집부렸다.
싫어 오세훈 이거 놔 나 안 가 백현이 두고는 못 가….
도경수가 몸부림쳤다. 하이톤의 고성이 들렸다. 분홍 돌고래가 작살에 꿰인 것처럼 파닥거렸다. 예상밖의 사고였다. 내내 인디언 핑크와 피치 핑크를 오가던 분홍색이 순식간에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정신이 넘어가기 직전의 도경수를 붙잡고 뇌까렸다. 그의 기억을 뭉텅이로 삭제했다.
도경수 너는 센터 같은 것 와본 적 없어. 센티넬이 뭔지 가이드가 뭔지 모르고 분홍 돌고래 같은 건 가져본 적 없고. 변백현도 모르고 오세훈도 모르고 오성욱은 영원히 모르고 살 거고. 그냥 살 거고. 도경수 너는 살 수 있고 살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개미는 고래를>
도경수가 변백현을.
변백현도 도경수를.
오세훈은 도경수를.
도경수가 내 능력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소문을 만드는 사람, 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