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 청순한 오후 A
  • 2020. 4. 25.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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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백현과 도경수는 같은 어플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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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 데이팅 어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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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경수는 [서울/28/바텀]이고 변백현은 [경기/25/탑]이다. 몇 가지 거짓도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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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백현은 이제 막 스무살이 됐다.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다. 친구들끼리는 19.9세라고 부른다. 새내기는 됐지만 큰 흥미는 없다. 오티 필참이라고 다섯 번이나 문자가 오길래 수신 차단을 해두었다. 뭐가 됐든 강요하는 순간 별로다. 기분이 그렇다. 변백현은 하고 싶은 걸 잘 하는 편이다. 하기 싫은데 하라고 하면 못된 성미가 들끓는다. 어떻게든 망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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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백현은 연애가 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변백현은 하고 싶은 걸 잘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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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경수는 왜 스스로가 스물 여덟이 되어서도 낭만같은 걸 꿈꾸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꿈꾼다. 얼굴도 반반하고 대화도 잘 통했으면 좋겠다. 섹스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그런 상대를 찾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다른 퀴어들보다 섹스 포지션이 절대적이라지만, 이름 앞에 붙은 ‘바텀’이라는 글자가 가끔은 너무 적나라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플라토닉을 꿈꾸냐면 그것은 절대 사양이다. 아, 도경수 복잡하네. 뭐가 하고 싶은 거야? 연애가 하고 싶은 거야 섹스가 하고 싶은 거야.

    글쎄. 어른의 연애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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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의 연애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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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경수는 어플에 환멸이 나있다. 장장 일주일간 말을 주고 받은 녀석은 라라랜드를 좋아한다고 했다. ost를 들어봤냐고 묻길래 대강 알고 있다고만 답했다. 비슷한 장르의 영화가 개봉한다고 운을 띄웠다. 얼핏 데이트 신청인 것 같기도 했다. 최근 몇 주간 받은 랜덤 쪽지중 가장 정상적인 녀석이었다. (그동안 받은 쪽지의 일부를 공개하자면, [함 꼬셔볼테야~] [몸으로 다이한번 떠보자] 등등이 있겠다.) 오픈 카톡으로 넘어갈래요? 경수가 물었다. 그 쪽에서 방을 만든다고 했다. 발 끝이 간지러웠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대와 연결되고 있다. 언제나 그 사실은 경수를 들뜨게 했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경수는 라라랜드는 그저 그랬고 녀석이 보자고 한 영화도 썩 흥미가 가진 않았지만 어쨌든 물꼬가 틔워졌다고 생각했다. 주소가 담긴 답신이 왔다. 아뿔싸. 녀석은 초짜인 모양이다. 서로 사진을 주고받자는 말도 없었는데 실수를 했다. 경수는 녀석이 감추지 못한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봤다. 분명히 경수와 동갑이라고 했다. 경기도에 살고 있다고 했고 판교나 분당과 같은 지명을 자주 언급했었다. 경수는 그 채팅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가봐도 중년의 행색을 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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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이 짓도 그만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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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스물 다섯 정도가 좋다고 생각한다. 이십과 삼십의 중간. 넷 다음에 다섯. 두 글자의 발음은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까지 든다. 너무 이십대같지는 않으면서 삼십대와도 거리가 있는 나이. 학교에 가서 모르는 친구들과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별로 안한다. 흥미가 없다. 어딜 가나 비슷하겠지. 하지만 스물 다섯의 변백현은 분명 뭐가 다르지 않을까? 악기를 하나쯤 자유자재로 다룬다든지 방학 동안 부지런히 공부를 해서 제 2언어랍시고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든지. 적당한 장단의 연애경험으로 마냥 순진하지는 않을 제 얼굴을 그려본다. 그 옆에는 아마 애인이 있을 것이다. 조용하고 다정한 만남일 것 같다.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에 꿰이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스무살이라고 하면 가차없이 돌아서면서 스물 다섯이라고 하면 말을 걸어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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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랜덤 쪽지에 답했고 그것은 백현이 어플을 깐 후 처음으로 보낸 것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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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요?? (이렇게 보내는 것 맞나? 백현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경수는 무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안녕하세요. (백현은 최대한 어른스럽게 대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뭐하고 있어요. (경수는 사실 그렇게까지 상대방이 궁금하지는 않다. 하지만 뭘 물어봐야 대화가 이어지니까)


    음악듣고 있어요.
    무슨 음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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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멜론 차트 2위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번화가에 가면 가게 건너 가게마다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당연히 상대방도 알 것이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좀 있어 보이고 싶었다. 스물 다섯은 있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알 것 같은 노래를 추천하기가 싫다. 몇 명만 좋다고 할 인디밴드의 신보를 좋아한다고 해서 무언가에 대단히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백현은 결국 음악 보관함을 뒤진다. 1. 앨범 아트가 감각적일 것. 2. 가사가 난잡하지 않을 것. 3. 새벽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것. 4. 사운드가 무난하면서도 독특한 부분이 있을 것. 유수의 음악상 심사위원이 된 것처럼 신중하게 음악을 골랐다. 그 사이 상대방이 쪽지를 삭제했을까봐 걱정이 든다. 백현은 신중하게 키패드를 눌렀다. 이런 음악쯤 몇 십개는 더 안다는 투로.



    14.
    좋아하는 노래인데 아실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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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는 그 노래를 몰랐다. 할 일은 딱히 없었다. 한참 후에 받은 메시지가 낯선 이름의 노래라, 한 번 들어보기로 한다. 경수는 음악을 고르는 기준이 까다로웠다. 첫 귀에 반한다는 말을 믿었다. 첫 귀에 감기지 않은 음악은 후에도 손이 안 갔다. 아무리 가사가 좋아도 그랬다. 중독성이 있다는 여러 후크송들도 경수와는 딴 이야기였다. 처음 들었을 때 좋은 노래를 주구장창 들었다. 그런 노래는 많지 않았다. 발견하면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의 취향을 알고서 노래를 골라도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이었다. 경수는 내심 예감한다. 그냥, 그렇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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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네요, 이 노래.
    지금 듣고 있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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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이 몽글몽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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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은 빗나갔다. 경수는 멜로디를 곱씹었다. 도입부의 기타리프부터 경수의 마음을 앗아갔다. 보컬은 나른하고 잔잔했다. 강렬한 사운드는 없었지만 노래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4분 13초 짜리의 노래. 경수는 4분쯤 되어서 노래를 다시 처음으로 돌렸고 잠시 후에 한 곡 반복을 눌렀다. 멜로디가 귀에 익자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보컬의 어조가 그렇듯이, 마냥 행복한 가사는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고 아파할거고 우리의 미래는 마냥 밝지 않을 거고 우리는 어쩌면 대단한 불행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거야. 그렇지만 우리는 비슷한 상처를 가지게 될거고 그런건 우리말고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는 우리가 될거야. 우리는 우리들이고 우리둘이지.

     


    19.
    보통 처음 만난 사이에 이런 분위기의 노래를 추천하지는 않는 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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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약간 후회중이었다. 실제로 경수는 처음 노래를 듣는 약 5분간의 시간 동안 백현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경수가 침대에 앉아 노래를 감상하는 동안 백현은 그제서야 가사를 곱씹었다. 아 실수했다. 좀 있어 보이고 싶었던 거지 슬퍼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닌데. 방 안을 돌아다닌다. 괜히 이불을 들썩여본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기실 상대방에 대해 아는 거라곤 나이와 지역과 섹스포지션 뿐인데. 왜 이렇게 보채고 싶은지 모르겠다. 만약 상대방이 아니 무슨 이런 노래를 추천해 진짜 별로다 이런 새끼랑은 당연히 맞을 리가 없지 하면서 대화방을 나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다시는 이 노래를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노래의 도입부를 들을 때마다 이 날의 새벽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새삼스럽게 무서웠다. 접촉하고 있는 매 순간이 자극적이었다. 노래로 기억하게 되는 사람. 시간으로 기억하게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단순히 얼굴을 아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분의 시간이 흘렀다. 단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좋다고 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지금 듣고 있다는 말에 백현은 볼륨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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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을 어딘가의 당신도 듣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노래에 젖어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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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보니 가사도 좋네요.
    좀 우울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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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한번더 후회 한다. 괜히 물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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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는 새벽을 아낀다. 낮 동안 겨우 감춰둔 권태와 게으름, 자조와 후회. 책망과 질투. 직장에선 그런 감정을 갈무리 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다. 하루종일 좋은 낯일 필요도 없지만 구태여 나쁜 감정을 곱씹으며 가라앉을 필요도 없었다. 마음이 건강해야 일도 잘 풀린다는 걸 실감하는 나이였다. 체력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만 경수는 마음이 건강해본적이 잘 없었다. 오히려 마음 속 병든 구석들을 일일이 살피고 들여다 보는 일을 좋아하기도 했다. 볕 든 인생에도 그림자는 지기 마련이었다. 큰 시련이 없어도 사람은 충분히 우울할 수 있었다. 경수는 사계절을 모두 탔다. 봄에는 겨울이 가서 싫었고 여름엔 봄이 가서 싫었다. 좋아하는 걸 알아가는 일만큼이나 싫어하는 걸 알아가는 일이 중요했다. 좋아하는 일을 해내서 즐거운 감정보다 싫어하는 일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고통의 감정이 훨 강력했다.


    직장에선 좋은 것만 할 수 없었다. 싫어하는 것이 많아졌다. 싫은 티를 쉽게 낼 수 없었다. 그러니 마음이 건강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굳이 8포세대 같은 유치한 학명을 붙이지 않아도 현대인은 너무도 병들기 쉬운 존재였다. 그러니 제 때 제 때 방치한 우울을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질긴 음식을 오래 씹듯 여러 번 곱씹으면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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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엔 좀 우울한 노래가 좋더라구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근데 전 그런 거 좋아해서.



    26
    19.9세는 새로운 세계에 발돋움하기 직전의 나이다. 많은 것이 달라지고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백현은 경수의 말을 가슴 깊이 이해했다. 봄이라고 다들 벚꽃 휘날리고 카라멜 마끼아또 마시는 노래를 들을 필욘 없잖아. 맞아. 사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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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우리 잘 맞는 것 같아요.



    28
    둘 다 잠에 들지 못한다. 비슷한 생각을 한다. 둘 다 센치한 걸 좋다고 해놓고서는 약간 걱정이 된다. 나야 가끔 이런 노래 들으며 감성에 젖는다지만 저 사람 혹시 요즈음에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스물다섯살한테 무슨 일이 있는걸까 스물여덟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비슷한 걱정으로 고개가 기운다. 지나온 길인데도 모르고 겪어본적 없어서 짐작하기가 버겁다. 앞자리는 똑같은 2인데. 새벽을 다 보내고서야 잠든다. 별 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눈 대화라곤 열 마디가 안 되고 같이 한 일이라고는 노래를 들은 것 뿐인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백현은 괜히 잠옷을 주물럭거린다. 아, 간지럽다. 왜 이렇게 간지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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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가 일하는 건물 1층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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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그곳에 알바를 구했다. 삼개월이 다되어가니 일이 제법 손에 익었다. 처음에 면접을 볼때만 해도 A4로 족히 여섯 장은 되는 메뉴 제조법에 학을 뗐었다. 카페에 이렇게 메뉴가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겁에 질린 백현을 보고 사장님은 활자로만 보면 어려워도 직접 해보면 쉬울 거라고 백현을 다독여 주었다. 백현은 조금씩 제조법에 익숙해져갔다. 할인 가능한 카드와 멤버십도 거의 다 외웠다. 점심 시간이 제일 바빴다. 직장인들이 있는 곳이다보니 한번에 주문이 쏟아지면 늘 정신이 혼미해졌다. 겨우 한가해지면 하루에 한잔 무료로 맛 볼 수 있는 음료를 만들어 먹었다. 백현은 주로 자몽에이드였다. 시큼한 자몽 에이드를 물고 어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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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커피 좋아해요?
    하루에 한 잔은 마시지.
    뭐 먹어요?
    난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럼 자주 가는 카페도 있겠네요.
    그런 건 딱히 없는 것 같아. 회사 근처가 제일 편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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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역시 형이다. 아메리카노는 써서 못 먹겠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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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는 점심시간이면 가끔 1층 카페에 들렀다. 주변이 죄다 비슷한 정장을 입은 회사 동료들이다 보니 아주 좋아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멀리 걸어가기 귀찮을때면 찾았다. 몇 달전부터 새로온 남자 알바생은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어렸다. 나이를 가늠해 보다가 부질 없다는 생각을 했다. 끽해봐야 스물 한 살 일 것 같았다. 피차 성인이라지만 어쩔 수 없이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매번 똑같은 주문에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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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커피를 내린다. 눈에 익을 수 밖에 없는 얼굴이 음료를 기다린다. 늘 깔끔한 차림새. 백현은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신다던, 스물 여덟의 형. 그 모습을 덧대 보는 것은 백현의 자유다. 커피를 만드는 속도가 느려진다. 보채는 기색도 없었다. 차분한 눈길로 백현을 기다린다. 훈훈한 내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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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렇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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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렇게 생겼으면 좋겠다.


    37
    경수는 음료를 받고 자리를 찾아간다. 백현은 답지 않게 허둥지둥 댄다. 경수가 어느 쯤에 앉았는지를 확인한다. 발칙한 상상이 멈추지를 않았다. 기분 좋은 상상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했다. 들뜬 마음으로 주문을 받는다. 에이드를 평소보다 시게 만들고 요거트 스무디엔 요거트 분말을 조금씩 더 넣는다. 과잉되어있다. 반 박자씩 빠르게 뛰는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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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결국 우유스팀기에 손을 데였다. 그래도 좋았다. 다쳤는데도 좋다니 그런건 이상하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상대방을 생각하다 입은 상처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아 로맨틱. 그 단어를 떠올리고 백현은 어플을 켰다. 어플은 좀 얄궃은 구석이 있었다. 서로 한 번씩 밖에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말한 다음엔 영락없이 상대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일하다 보낸 쪽지, [오늘 날씨 진짜 좋아요] 엔 아직 이렇다할 답장이 없었다. 왜 이렇게 쫄리지. 날씨가 별로라고 했어야 하나. 아니지, 날씨 좋다는 말에 뭐라 답할 말이 있겠어. 할 말 없게 하는 말이잖아. 그러니 답장이 오지를 않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백현은 경수가 앉아있던 자리를 흘긋거렸다. 그새 빈 자리가 됐다. 그게 꼭 답장 없는 어플 같아서 마음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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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플은 3일마다 한 번씩, 내 차례에 한번 씩 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백현은 그걸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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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 스팀기에 손 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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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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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깨닫는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아까부터 심장이 반 박자씩 뛰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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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형이었으면 좋겠는 사람 봤거든요. 아 ㅋㅋㅋ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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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진짜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부끄럽다고 말했다. 익명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솔직했고 헐벗은 기분이 들었다. 백현을 부끄럽게 한 당사자에게 직접 부끄럽다고 말하는 기분이란. 네가 좋아! 하고 자신있게 고백하던 유치원생으로 돌아간 듯 했다. 경수의 답장을 기다리는 찰나동안 부끄러워 하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특별히 붉어진 곳도 없는데 온몸이 홧홧했다. 따지고 보면 경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고작 어플로 좀 대화했다고 오만 인간 군상에 상대방을 비춰보고있는 제 모습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좀 오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멈출 수 있는 오바가 아니었다. 멈추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19.9살의 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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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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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그 후로 경수가 카페에 올때마다 주시했다. 물론 메뉴는 언제나 똑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백현은 그 8글자를 내뱉는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느날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요-였고 어느날은 아이스아메리카노요, 였다. 관심이 가는 만큼 세세한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매번 똑같은 옷 인줄 알았던 옷차림도 그날 그날 조금씩 다른 디테일이 있었다. 회사원이라고 다 같은 회사원이 아니었다. 어플 속 형도 이런 걸 신경쓰며 다닐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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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의 시선은 좀 집요한 데가 있다. 백현이 무언가를 쳐다보면 그 무언가는 백현을 의식할 수 밖에 없다. 백현을 전혀 모른데도 그렇다. 길거리에서 잠깐 스치고 마는 인연에 불과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경수는 요며칠 백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경수는 계산도 제대로 했고 멤버십으로 백현을 귀찮게 하지도 않았으며 먹은 후에는 휴지를 비롯한 쓰레기까지 깔끔히 치웠다. 책 잡힐 구석은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줄 만한 텐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별안간 뜨끈해진 시선에 경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골몰했다.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해봤다. 그래봤자 결론은 비슷했다. 게이더가 발동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구애에 경수의 답은 확실했다. 안 됐다. 어려서냐고 물으면 맞았다. 어린 사람에 대한 편견이라기 보단 비슷한 나이를 지나치게 선호하는 까닭이었다. 이제 막 정체화를 해서 돌아다니는 사람과는 힘들 게 뻔했다. 

     

    경수는 연애만큼은 아늑하고 편안하게 하고 싶었다. 불같지 않아도 되었다. 경수가 연애를 통해 얻고 싶은 건 힘들고 지칠 때 무조건 내 편이 하나쯤은 있다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었다. 매일을 울고 달래보고, 또 그러다가 키스하는-미국 영화같은 연애는 정중히 거절하고 싶었다. 대충 나이를 셈해보다가, 스무살이나 스물 한 살의 자신을 돌이켜보다 다시 맘을 접었다. 못할 일이다. 안 될일은 아니지만 안하고 싶다. 사고를 마치자 행동이 분명해졌다. 아까부터 경수의 근방을 헤매는 눈빛을 똑바로 마주했다. 불쾌하다는 티를 냈다. 미안할 건 없었다. 고백을 들은 것도 아니거니와 여기는 경수의 직장이었다. 단칼에 거절할 이유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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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자신의 시선이 가진 힘을 몰랐다. 그래서 난데없이 째려본 경수였다. 늘상 무표정으로, 아니면 그보다 희미하게 웃는 모습으로 카페를 채우던 고객이 모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당황스러워진 백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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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형 성격이 어때요. 까칠한 편이에요? (백현은 보내자마자 후회했다.)
    아니야 그래도 노력은 해. (카페 종업원을 상대한 일로 경수는 조금 뜨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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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칠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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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아까 그 사람 나 왜 째려봤지. 나 어디가서 미움 받아 본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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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형한테는 미움 받기 싫은데.)
    나? 음. 웃는 게 예쁜 사람.
    저 웃는 거 예뻐요.
    그래?
    솔직히 저 훈훈하게 생겼어요. (백현은 이 문자를 보내고 가장 많이 후회했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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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나쁘진 않아. (경수는 한참후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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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시시콜콜한 일을 공유하는 걸로는 성에 안찼다. 몇 단계쯤은 그냥 건너뛰고 싶었다. 다 불필요한 절차같았다. 만나고 싶었다. 경수도 그럴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방금의 대화가 그랬다. 나는 이렇게 생겼고 너는 저렇게 생겼고. 그래,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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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우리 만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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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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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수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했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달 쯤 대화를 지속하다보면 문자나 카톡으로 넘어갔고 전화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예감이 있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일도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모든게 자연스러워서 경수는 그 일에서 어떤 불행의 가능성도 찾아내지 못했다. 나쁘게 헤어지는 만남이란 먼 나라의 일 같았다. 굳이 사귀지 않더라도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 한 명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나갔다. 용모는 생각한 것과 흡사했다. 다만 소프트웨어가 너무 달랐다. 모든 것이 꾸며낸 말투였고 경수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대화는 한 낮의 꿈이었다. 물론 익명으로 하는 대화니 어느정도의 거리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질 낮은 욕을 내뱉으며 피차 얼굴 보면 자는 거 아니냐며 왜 내빼냐고 했던, 포악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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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이른 거 같아, 그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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