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 D의 루머 13
  • 2020. 4. 28. 01:53
  • 센티넬버스 세계관

     

     

     

    *

     

    내 슬픔엔 구멍이 많았다. 아마도 사람들이 날 외면하는 건 그 속으로 빠질까 두려워서 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

     

    구부린 허리를 폈다. 주변이 고요했다. 변백현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와 같은 공간이었다. 언제 소란스러웠다는 양 감쪽같은 침묵.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불에서 텁텁한 냄새가 났다. 내가 흘린 눈물의 흔적일지도 몰랐다. 문득 센터가 기어코 봄을 사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변백현, 혹은 신디, 혹은 김민석, 혹은 누군가. 센터에 갇힌 사람들이 온몸으로 내뿜는 우중충한 기운을 가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배경이었다. 하늘이 무서우리만치 맑았다.

     

    변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곧 대답이었다.

     

    변백현이 날 윽박지를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네가 뭘 이해해? 라든가 네가 뭘 받아들여, 같은 힐난. 그럼 난 발개진 얼굴로 소리칠 작정이었다. 알았어, 아무것도 이해 못 했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난 너를 이해 못 할거야, 내가 널 이해 못 할 거라는 걸 이해했어, 더는 질척거리지 않을게. 그걸 바라는 거지? 그렇지? 내 체념조가 변백현을 나쁘게 포장하길 바랐다. 그럼 나는 상대적으로 불쌍하게 보일 테니까. 나는 나를 낮춤으로써 변백현이 날 상처 입혔다는 걸 조금은 드러내고 싶었다.

     

    변백현은 변백현이었다. 내 알량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후련하다고 생각했을까?

     

    날 떼어내서….

     

    공중에 뜬 채로 사는 삶은 없다. 반지하 방이건 고급 펜트하우스건 아니면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이건 사람은 어딘가에 몸을 기대고 무게를 싣는다. 변백현의 등을 욕심내진 않았다. 손바닥이나 손끝. 감히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보살피고 싶었다. 나는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었다. 변백현이 종종 내 존재를 까먹을 정도로.

     

    그런데 그것도 이제는.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니까요…”

    “문 열어요.”

    “이러시면 진짜 곤란해요.”

    “민석군 지금 곤란해? 근데 그게 내 곤란만 할까?”

    그럼 그렇지. 변백현이 다시 들어올리가.

     

    “경수군은 연기가 아주 일품이네.”

    “네?”

    “얼굴도 빤빤하고.”

     

    세련된 말투로 남을 깔아뭉개던 사람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남자는 내가 알 수 없는 일로 나를 혼냈다. 잠자코 듣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대충 고개를 숙이려는데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내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남자의 매서운 눈빛이 내 동공을 쑤셨다.

     

    “경수군, 언제까지 피할 생각이었어?”

     

    나는 피해 본 적이 없었다. 손쓸 새 없이 당하는 편이었다. 내 불행은 언제나 나보다 키가 컸다. 나는 늘 내 불행이 드리운 그림자를 밟아야 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아직 모르쇠네.”

    “학회장님 일단 나가서 저랑 얘기하세요. 경수씨 아직 상태가…”

    “민석군이 경수군 보호자야? 백현군도 아닌데 왜 나서.”

     

    “참, 백현군도 이건 모르지?”

     

    남자가 싸구려 일일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종이 뭉치를 던졌다. 김민석이 허둥거리며 바닥에 흩어진 것을 하나씩 주웠다. 남자는 그런 김민석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전히 내 턱을 손에 쥐고 나를 응시했다. 주문처럼 뇌까렸다.

     

    “경수군, 내가 하는 일이 뭔 줄 알아요? 바로 경수군 같은 인재의 효용성을 높이는 거예요. 잘 키워둔 것들이 제멋대로 망가지면 안되니까요. 제일 중요한 건 바로 폭주. 폭주는 대표적인 지뢰죠. 폭주를 막는 게 곧 상품을 오래 보존하는 길이고. 그래서 센터에선 폭주의 과정이나 원인, 혹은 폭주 후 살아 돌아온 센티넬과 가이드의 몸의 상태를 분석할 수 밖에 없어요.”

    “…”

    “폭주를 겪은 센티넬이나 폭주 상태의 센티넬을 가이딩한 가이드의 몸에선 폭주인자가 발견되거든. 폭주를 한 번 겪었으면 한 개, 두 번 겪었으면 두 개. 정직하기 짝이 없어.”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굴욕적인 자세로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엔 묘한 광기가 어려 있었다.

     

    “도경수, 설명해봐. 왜 네 몸에 폭주인자가 한 개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종이를 줍던 김민석이 남자를 말리려고 다가왔다.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뼈가 짓눌렸다. 물리적인 아픔이 선연했다. 반가웠다. 변백현이 준 아픔엔 범위가 없었다.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남자가 주는 고통은 확실했다. 차라리 이런 종류가 당하기에는 편했다. 내가 저항하기를 포기했다는 걸 느꼈는지 남자의 얼굴에 살짝 주름이 졌다. 잘 만들어진 표정이 일순 자제력을 잃었다.

     

    “저는 정말 무슨 말씀인지…”

    “원인불명의 폭주 후 사망. 이게 경수군이 다시 센터에 나타나기 전의 결론이에요. 물론 우리 아들놈도 마찬가지지. 무슨 자연재해처럼, 둘 다 쓸려나갔으니까. 근데 경수군은 멀쩡히 돌아왔죠. 아, 대가리가 날아간 채로.”

    “…”

    “게다가 가이드? 처음 보는 신화였지.”

    “…”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니 몸에 폭주인자가 두 개가 있어야 맞다고. 뒤질뻔 했을 때 하나, 뒤지려던 놈을 살릴 때 하나, 그렇게 두 개. 근데 하나라네?”

     

    <경수>의 끝은 초라했다. 나는 그 볼품없는 결말에서 나와 <경수>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원인불명.

     

    “대가리 날아갔다는 거, 거짓말이지?”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됐는지는 설명 못 해요. 원인불명이라.

     

    “저기, 학회장님도 보셔서 아시잖아요. 경수씬 정말로 기억을 잃었어요.”

    “민석군, 그럼 민석군이 대신 설명해봐. 둘 다 폭주로 뒤진 줄 알았는데 한 명만 살아 돌아왔어. 대가리가 빈 채로. 그래서 생각했지. 아, 폭주 후유증이구나. 근데 웬걸, 폭주를 겪은 적이 없다는 거야. 폭주를 겪은 적도 없는데…머리는 빈 깡통이고. 이상하잖아.”

     

    그새 종이를 다 주운 김민석이 나와 남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가까스로 사이가 벌어졌다. 남의 손에 붙잡혔던 피부가 얼얼했다.

     

    이상하잖아….

     

    익숙한 평가였다. 엄마는 가족들하고만 지내서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며 동창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새 교복을 맞추듯 새 정장을 사주었다. 스무 살이 무슨 정장. 미감이 예민하지 못한 내 눈에도 우스꽝스런 복장이었다. 말릴 수 없어 그대로 입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로또를 믿는 사람이었다. 불알친구니 뭐니 하는 애들을 떼로 만나 놀다 보면, 혹시 알아?

     

    모임은 학교 근처의 카페였다. 저녁까지 네가 사고 오라며 준 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견딜 수 없이 초조해졌다. 패착이었다. 차라리 늦게 올걸.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누구에게도 인사할 수 없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나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을 제외하곤 모두 내 또래처럼 보였다. 여기저기 부식된 조각상처럼 앉아있었다. 누군가 날 알아봐주길. 먼저 인사해주길. 새어나온 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했다. 경수야!

     

    아, 드디어.

     

    옆에 있던 녀석이 자꾸 내 손목을 주물럭거렸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 물어보는데 대답할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러게, 하고 자연스럽게 대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간밤에 본 스릴러 영화가 문제였을까. 나는 빠른 속도로 얼굴도 생김새도 향기도 낯설기만 한 이 집단이 버거워졌다. 친구가 맞긴 할까? 친구가 맞는데 이렇게까지 불편하다고? 어설픈 의문이 계속됐다. 엄마에게 귀띔이라도 받았는지 아까부터 자꾸 추억팔이였다. 손목을 더듬던 손으로 박수를 쳤다. 손이 커 소리도 컸다. 야, 그때 얘 완전 바보같았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열 개의 동공이 나를 스쳤다. 내 얘기구나. 눈치로 짐작했다. 와-하-하.

     

    싸늘해졌다. 나는 범죄현장에서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 나왔다.

     

    카페 화장실은 남녀 공용이었다. 양변기 뚜껑을 올리지도 않고 그 위로 주저앉았다. 비릿한 오줌 냄새가 역겨웠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 표정들. 이모라는 사람, 고모라는 사람, 사촌 동생이라는 사람,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친구라는 사람들. 처음 겪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내게 대단한 면역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말소리가 들렸다. 헐거운 잠금쇠를 손에 쥔 채 몸을 떨었다.

     

    걔 진짜 이상해졌더라.

    정말로 이상해진거 있지?

    그렇게까지 이상할 줄은….

     

    나는 돌아가지 못했다. 핸드폰을 천천히 꺼냈다. 아들, 잘 놀고 있니? 엄마의 카톡을 무시했다. 떠듬떠듬 화면을 눌렀다.

     

    이상-하다.

     

    1)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 2)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르다. 3)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다.

     

    1번 아니면 3번이었다. 나로 완성한 문장은 모조리 그랬다.

     

    지금도 역시.

     

    “당분간 가이딩은 금지. 아무리 뛰어난 가이드면 뭘해, 속을 알 수가 없는데.”

    “…”

    “나 화난 거 아니에요. 흥미로운거지. 경수군을 벗겨내면 거기 뭐가 있을지 정말…미치게 궁금하거든.”

     

    알량한 몸뚱이로 겨우 부릴 수 있던 잔재주마저 금지당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내 직업의식은 형편없었다. 여전히 타인을 낫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신기했지만 앞으로 그 어떤 순간이 와도, 누구를 가이딩해도 변백현을 살릴 수 있을 때만큼 감동적이진 못할 것이다. 내게 생긴 좋은 마음을 그에게 줬다. 그가 가지지 않더라도 이미 나에겐 없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나쁜 것들뿐이다. 줄 수도 버릴 수도 없어서 다만 짊어져야 하는.

     

    남자는 나갈 때도 거침없었다. 수행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쩔쩔매며 그의 뒤를 따랐다. 김민석의 얼굴이 처음 내게 가이드라는 판정이 떨어졌던 때처럼 복잡했다.

     

    “무슨 그런 결과가.”

     

    센티넬이나 가이드나 폭주.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 널린 곳에서 내 일이 그렇게 기함할 정도인가?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런 게 아니라.”

    “원인불명. 여기서 제일 흔한 말 아니었어요?”

    “경수씨.”

    “저도 화내는 거 아니에요. 받아들이는 거지. 난 모두가 대단히 여기는 가이드지만, 한순간에 멱살 붙잡혀 모욕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라는 걸.”

     

    “…일찍 받아들일수록 편하거든요.”

     

    변백현에게도 그랬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였다.

     

    “처음 있는 케이스라 그래요.”

    “…그런 거 많잖아요. 변백현도…”

    “많죠. 갑자기 죽고, 갑자기 사라지고, 갑자기 능력을 얻고, 많아요. 그래도 하나의 공통점은 있죠. 폭주를 거쳤다는 거.”

    “…”

    “변백현이 갑자기 저렇게 된 것도 폭주 이후니까요. 그런데 경수씨는, 폭주도 없이 사라지고, 폭주도 없이 특질이 변하고, 폭주도 없이 기억을 잃었잖아요.”

    “그게 그렇게.”

    “저야 뭐 경수씨가 폭주를 겪었든 안 겪었든 상관없죠. 근데 센터나 오성욱 입장에선 미칠 노릇일 거예요. 완전, 통제 밖이니까. 못 본 거니까. 그런 새끼가 있으면…곤란해지니까.”

    “…”

    “조심해요. 제가 말했죠? 센터, 상상이상으로 무자비해요.”

     

    상상을 해봐, 라고 루머가 말했었다.

     

    뭘?

    네가 과거에 어땠을지.

    그게 의미가 있어?

    …좀 해봐.

    안 할래.

    너 아무 기대도 없잖아. 아무것도 너한테 의미 없고.

    그래서?

    과거라도 네 멋대로 해보라고. 희망찬 미래 같은 거, 갖다줘도 버릴거잖아.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잠깐, 생각했다.

     

    내가 있던 방은 유독 창이 컸다. 낮 동안은 눈만 돌리면 아파트 숲이 보였다. 못생긴 건물과 방충망에 걸린 하늘은 솔직히 아름답진 않았다. 중국발 미세먼지라는데 가끔은 잘게 부식된 콘크리트가 흩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람도 사물도 만들어진 것이라면 모두 낡기 마련이니까. 꽉 들어찬 전경이 부담스러웠다. 고층 엘리베이터를 쉬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사람들. 빨래 걷는 여인.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 움직이는 것을, 쉬지않고 움직일만한 에너지가 있는 것들을 보는 게 괴로웠다. 나만 고여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면 커튼을 쳤다. 방 한 칸 넓이의 도피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커튼을 걷었다. 노을을 보기 위해서였다. 여러 작품이 묘사하는 것처럼 마냥 붉지는 않았다. 얼룩덜룩하니 경계가 없었고 날씨에 따라 색깔도 다 달랐다. 어느 날은 보라색이 짙었고 어느 날은 노란색이 짙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짧고 눈부셨다. 찰나에 사라지지만 반드시 다시 나타나는 것. 어느 자연현상보다 믿음직했고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상상은 빈약했다.

     

    이 노을만큼은, <경수>도 좋아했을 것 같다.

     

    그게 다였다.

     

    상상이상으로, 같은 말은 어려웠다.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삼은 단어는 죄 그랬다.

     

    김민석은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거동이 자유로워졌다. 간이 밍밍한 환자용 식단이 지겨웠다. 센터 식당으로 가려는데 신디가 얼굴을 내밀었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진짜 괜찮은 게 맞냐며 거듭 물어왔다. 괜찮다는 말에도 부축을 하겠다고 오버를 떨었다. 푸스스, 가벼운 웃음이 샜다. 그동안 센터에 있었던 굵직한 소식, 오늘의 식당 메뉴 등등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통 집중이 안되는 거 있죠.”

    “아, 네.”

    “아직도 손발이 떨려요. 경수씨는 완전 정신 나가서 막 욕하고. 저 경수씨 그런 모습 처음 봤잖아요.”

    “제가요?”

    “어머, 경수씨가 그랬어요. 저도 연락받고 달려와서 뒤에 있었거든요.”

    “아.”

    “혹시라도 민석씨도 다쳤을까봐…아무튼 그건 그거고. 전 솔직히, 그동안 경수씨가 기억도 잃고 해서, 백현씨랑 서먹한줄로만 알았거든요.”

    “…”

    “근데 제가 잘못 짚었던 것 같아요. 맞죠?”

    “제대로 보셨어요. 저 이제 변백현 가이드 아니에요.”

    “네?”

    “당분간은 가이딩도 금지고.”

     

    “소문 아니었어요?”

     

    그게 벌써 소문으로 돌 만큼 나와 변백현이 떠들기 좋은 이야깃거리구나.

     

    식당은 여느 때처럼 붐볐다. 센터 특유의 락스 냄새 비슷한 약품 냄새가 곳곳에 은은하게 퍼져있는 탓에 다들 접시에 코를 박고 식사중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게 나와도 식당엔 식사 시간 특유의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가 없었다. 다들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섭취’했다. 필요한 영양소만 골라 열심히 씹었다. 마치 이것도 하나의 훈련인 것처럼.

     

    “저기로 갈까요?”

     

    신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리킨 곳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변백현이 있었다. 그새 살이 빠졌는지 얼굴선이 더 날카로웠다. 고개를 저었다. 더는 변백현의 어떤 것도 건들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변백현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골랐다. 흘끗대는 눈빛이 느껴졌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싸웠어요?”

     

    그걸 싸웠다고 할 수 있을까.

     

    “밥 먹죠.”

    “저 사실 경수씨 가르치면서 긴가민가했거든요. 백현씨를 생각해 보라곤 했지만,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경수씬 특히나 센터에 잘 적응도 못한 상태였으니까.”

    “…”

    “경수씨가 욕해서 놀란 거 아니에요. 경수씨 그렇게 간절한 모습 처음 봤어요.”

    “신디씨.”

    “어줍잖은 위로가 아니라, 경수씬 사람을 살렸어요. 앞으로도 살릴 수 있구요. 백현씨랑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만큼은 사라지지 않아요.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린 사람이 다시 죽고 싶어 할텐데,

     

    그래도요?

     

    질문만으로 비참해졌다. 못 들은 척 숟가락을 움직였다.

     

    풉.

     

    “야, 왜 웃어.”

    “웃기잖아. 가이딩도 금지당한 주제에 무슨.”

    “그거 진짜래?”

    “둘이 따로 있는 것 봐. 척하면 척이지. 애초에 능력도 뽀록아냐?”

    “헐, 설마.”

    “나 아직도 쟤 센터온 날 기억해. 등급이 무슨, 씨발. 에프였나? 암튼 쓰레기였는데.”

    “에프도 있어?”

    “있더라니까. 근데 갑자기 무슨 가이드. 그것도 S? 처음부터 수상했다니까.”

    “그래도 변백현 폭주온거 살렸다며.”

    “쟤가 살린 거 맞아? 난 모르겠다. 각인했다고 하긴 하는데 영. 봤어야 말이지.”

     

    신디가 나서려는 것을 말렸다. 들으라고 하는 말 중에 정말 들을 만한 건 몇 없었다. 오히려 듣지 말았으면 하는 말들이, 잠깐의 진심이 나를 움직이곤 했다.

     

    악역이 너무 얄팍하면 독자는 흥미를 잃는다. 대개 그런 인물들은 서사의 큰 줄기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어떤 이름도 배경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의 인생.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반복해서 되뇌었다. 한 페이지만, 한 페이지만 넘기면 사라질 족속들이다….

     

    “가이드가 가이드못하면 여기 왜 있는거야? 세금 축내면서.”

    “그러게.”

    “센티넬일때도 그랬는데, 가이드라고 별 거 있겠…아.”

     

    지껄이던 소리가 멈췄다.

     

    “나도 궁금하네.”

    “…”

    “그것도 능력이라고 달고 다니는거야?”

    “야.”

    “삐-이.”

    “…”

    “도 있어? 센터에? 세금 존나 축내면서.”

     

    “삐-이. 발음부터 조잡해.”

     

    에쓰 변백현의 조롱에 삐-이 무리들이 제대로 반박은 못하고 그저 꿍얼꿍얼댔다. 변백현이 표정을 구기곤 쐐기를 박았다. 좀 가, 인생에서도 삐소리 나고싶은 거 아니면. 그리고선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한 페이지도 아니었다. 반의 반 페이지. 변백현은 백마 탄 센티넬, 나는 쓸모없고 나약한 가이드. 정말로 동화였다면 변백현에게 매달려 울거나 변백현에게 반하거나 변백현을 끌어안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타이밍이었지만 센터에 있는 동화책은 모두 낡고 찢어진 것들 뿐이었다.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그러지 마세요.”

     

    변백현의 약하고 예리한 얼굴과, 나의 무디고 단호한 얼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려워져요.”

     

    변백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넌 진짜 씨발…”

    “…”

    “이상해.”

     

    “모든 게 그래.”

     

    그래서 돌 것 같아….

     

    네가 말하는 이상함은 내게 없었던 새로운 의미일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접어.

     

    가짜에게 신경 쓰지 마.

    가짜이고 가짜일 것에, 더는 그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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