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 D의 루머 12
  • 2020. 4. 28. 01:44
  • 센티넬버스 세계관

     

     

     

    *

    그때 했던 말.

    무슨?

    내가 텅 비어있다던.

     

    크리스마스였다. 루머는 백화점에 딸린 마트에서 싸구려 와인을 사왔다. 남은 야채로 안주를 만든다길래 말렸다. (루머는 입이 짧았고, 그래서 그런지 요리에도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본인은 열심히 한다고 하는 것 같지만.) 아, 와인잔이 없구나. 잔이 없지 가오가 없어? 아니지. 잔도 없고 가오도 없구나. 벌써 취했는지 발음이 꼬였다.

     

    나는 루머가 취한 것을 좋아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취한 사람을 상대로 나는 좀 솔직해 질 수 있었다. 내가 말하고 그는 까먹는다. 나는 내가 털어놓는 말이나, 하는 행동, 무심코 흘리고 마는 진심 같은 것이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지길 소원했다. 번번이 빈 껍데기 취급을 받았지만 내게도 마음은 있었다. 내색하지 않는 법을 익혔을 뿐. 루머의 고개가 삐딱하게 고꾸라졌다. 홀로 마시는 건 섭섭하다며 내게 따라준 밀키스엔 입도 대지 않았다. 뿌연 것이 꼭 안개를 연상시켰다.

     

    밀키스는 핑계였다.

     

    나는 안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텅 비어있다>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디에도 표지판은 없었다. 재난 영화의 조연이었다. 주인공이 조력자와 여자 주인공과 놀라운 아역을 만나 멋들어지게 난관을 타파하거나 혹은 강렬한 인상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는 동안,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 아무도 생사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입은 텁텁해지고,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없어 거울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살필 수 있는. 아마도 그 사람은 기어코 안개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안개가 없는 곳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했을 것이다. 마치 나처럼. 그리고 볕 좋은 곳에서 건강한 햇살과 함께 자란 사람들이 손가락질 했겠지. 저기 봐. 텅 빈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텅 비어있을 수 있니?

     

    그렇지만,

     

    비어있다는 건 채울 공간이 있다는 것. 텅 비어있다는 건 그런 공간이 아주 많이 있다는 것. 아무런 편견 없이 모두를 바라볼 수 있고, 어떤 애정도 쉽게 뿌리 내릴 수 있다는 것.

     

    나는 나만큼 쉬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나만큼 열린 사람이 없다고도 생각해.

     

    사실은 내가 아주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고, 감히…낙관해.

     

    *

     

    들어오기 전 오직 변백현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혼자서 구멍을 넓히는 일이 소름끼치고 무서웠지만 변백현이 이 보잘 것 없는 삽입으로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다.

     

    “와…경수네. 나 꿈꾸나봐.”

    “…”

    “꿈에 나온 거 처음이다.”

     

    대충 봐도 변백현의 몸은 피딱지로 가득했다. 약물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입 안 어딘가를 다친 건지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겨우 눈을 뜨는 게 다면서 나를 보려고 애를 썼다. 아니, <경수>를 보려고. 변백현은 흐린 눈빛으로 과거를 헤맸다. <경수>처럼 굴어야 하나 싶었지만 바로 생각을 접었다. 그 앞에서 <경수>를 흉내 내는 것만큼의 기만도 없었다.

     

    “변백현씨. 지금 이럴 시간이…”

    “왜 그렇게 딱딱하게 말해.”

    “…”

    “알려주면 안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뭘 잘못해서 나를 혼자 둔 거야? 내가 뭘 잘못해서 네가 사라진거야?

     

    질문이 쏟아졌다. 무시하려고 했다.

     

    각인의 첫 단계는 그 기계적 특성과는 다르게 좀 로맨틱한 구석이 있었다. 센티넬의 신체 중 에너지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세 군데에(보통은 손목이나 발목이었다.) 차례로 입을 맞추는 것이었는데, 변백현의 경우엔 쇄골이 먼저였다. 피로 얼룩진 제복을 끌어 내렸다. 변백현이 거칠게 숨을 몰아 쉴 때마다 판판한 상박이 요동쳤다.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정말 꿈 맞구나.”

    “…”

    “경수가 가이드일리 없잖아.”

    “변백현씨, 정신 차려요.”

     

    바로 입술을 갖다 댔다. 신열로 변백현의 몸이 뜨끈했다.

     

    “나 근데, 정말…바란 적 없는데.”

     

    쇄골 다음이 양 손목이었다. 변백현은 쉼 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일 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

     

    “난 너랑 손바닥만, 손바닥만 비벼도 좋았어. 네 어깨에 기대있는 걸 가장 좋아했어. 네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어. 웃음이 절로 났어. 너만 있으면 센터? 하나도 안 지루했어. 쇠창살 같은 게 있어서, 우릴 갈라놨대두…우린 알아봤을거야. 평생 목소리만 들을 수 있대두 그랬을거야. 네가 가이드였다면 정말로, 정말 신께 매일 감사하며 절하고 살았을 정도로 좋았겠지만 바란 적 없었어. 진짜야. 정말이야. 신은 이미 경수 널 만들었잖아. 그럼 됐지. 뭘 더 바라. 더 바라면 욕심이지.”

     

    변백현이 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변백현이 나를 통해 <경수>를 본다고 느꼈던 것 내 뼈아픈 착각이었다. 그에게 <경수>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경수>앞에서 까발려지는 변백현이 그랬다. 나로 살면서 내 몫이 아닌 슬픔을 짊어진 경험이 많았지만, 이번만큼 심장이 저릿한 적은 없었다. 아마 그건 내가 변백현에게 가진 감정때문이겠지.

     

    기만이라고 생각해 꺼린 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질투였다. 제정신이 아닌 변백현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다. 너를 살리고 있는 건 <경수>가 아니라 나야. 내 포부는 변백현이 그동안 가슴 속에 숨겨둔 <경수>를 향한 마음에 비하면 한없이 얄팍했다. 보고싶어. 보고싶었어. 보고싶어. 변백현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 붙잡힌 내 양팔이 꼭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이 좁은 곳에 갇혀 있다는 게, 그거 정말 각자에겐 못 말리는 불행인데. 우리에겐 커다란 행복이라는 게, 나를 살게했어. 숨 쉬게 했어.”

     

    “오세훈이 물어봤어. 나는 네가 잘 살았으면 했어. 행복하길 빌었어. 그게 다였어. 네가 없는 건 상상해본 적 없었어…경수야.”

     

    경수야.

     

    보고싶어.

     

    이것이 관계구나.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줘놓곤, 돌려받지 못해 울 수 있구나. 그렇게 상처입을 수도 있구나.

     

    “…각인 시작하겠습니다.”

     

    폭주 중인 센티넬은 지뢰밭이었다. 어디를 밟아도 쉽게 죽을 수 있었다. <각인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이 가이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신호로, 센터는 폭주 중인 센티넬과 가이드가 섹스 하고 있는 공간과의 연결을 끊었다. 사방에 안전망을 쳤다. 끝끝내 살려내지 못한다고 한들 두 사람의 비극에서 끝날 수 있도록.

     

    아무도 이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

     

    무작정 변백현의 옷을 벗겼다. 나신으로 그와 부딪혔다. 변백현은 저항도 의지도 없었다. 오롯이 나의 일이었다. 생리적인 아픔으로 신음이 터질 때마다 나는 기도했다. 변백현이 나를 찢고 살아나기를. 내 숨이 여기서 다하기를. 그래서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때는.

     

    다른 건 다 잃어도 좋으니 기억만큼은 멀쩡하기를.

     

    *

     

    도경수, 너는 틀렸어.

    너는 <경수>와 다르기만 한 게 아니라, <경수>의 오답이야.

    가능성?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

     

    가습기의 공기가 코를 간질였다. 일어나기 싫었다.

     

    “…경수씨, 깼어요?”

     

    그 전의 가이딩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김민석의 호출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쉽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는지 김민석이 나를 부축했다. 조심, 조심이요. 걱정 가득한 눈빛이었다. 내가 살아났다는 건 변백현도 살아났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를 구했구나. 어리석게도 뿌듯했다.

     

    “어…센터는 아직 엉망이에요.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은 가는데 증거가 없어서, 다들 그거 찾느라 사활이거든요.”

    “…”

    “변백현은,”

     

    숨을 참았다.

     

    “아직 깨꼬닥 중. 닥터말로는 일어날 때도 됐다던데.”

    “아, 네.”

    “경수씨, 이 말 내가 안 했죠”

    “…”

    “고마워요.”

     

    변백현을 살려서? 아님, 나 또한 살아줘서? 당연히 전자겠지.

     

    변백현을 살려냈다는 뿌듯함은 잠시였다. 김민석이 목 좀 축이라며 물을 건넸다. 차가웠다. 입에 머금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마디마디가 쑤셨다. 그새 미지근해진 물을 삼키는데 꼭 가시라도 있는 것처럼 목구멍이 쓰라렸다.

     

    김민석도 <경수>와 변백현에 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믿기지 않는 설화였고, 신디에게는 다시 없을 신화였으며, 나에게는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변백현은 아무도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에게도 그랬고 남에게도 그랬다. 껍데기만 빌려 쓴 나는 더더욱 불합격이었다. 변백현이 나를 꺼려 할 만도 했다. 존재만으로 그를 괴롭게 하는 내가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주제넘게 <경수>를 잊으라고 하고, 이런 저런 감정을 발산하며 그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그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내가 가이드인 만큼 그에게 우스운 일이 있었을까.

     

    “…정말 저 말곤 대안이 없나요.”

    “대안이요?”

    “저 말고 가이드 할 사람이 없냐구요.”

    “경수씨, 어, 당황한 거 알아요. 각인이 생각만큼 아니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고, 당연히 지금 몸도 말이 아닐테고. 그래도 경수 씨라 이 정도 인 거예요. 다른 가이드 투입됐다간 싸그리 송장 치울 뻔 했어요.”

    “…”

    “변백현 성깔 더러운 거 알아요. 그래도…”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이 곳은 지나치게 맑았다.

     

    “…무슨 다른 일 있어요?”

     

    나는 안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역시 이런 곳은 내게 맞지 않았다.

     

    김민석의 눈동자가 반질반질 빛났다. 투명했다. 신디가 몇 번이고 칭찬하던 것이었다. (신디는 기분이 좋은 날이면 내가 묻지 않아도 김민석에 관한 것들을 털어 놓았다.) 민석씨는 능력만 빙결인 게 아니라, 꼭 교과서에서 보던 눈의 결정 같아요. 그 말에 나는 배터리가 방전된 장난감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내 태도가 지나치게 무성의했는데도 신디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목소리를 한껏 죽인 채였다. 그래서 말인데, 민석 씨가 눈밭에 누워있는 걸 보고 싶어요. 너무 근사할 것 같거든요.

    지겨운 온실 속에서 겨울을 꿈꾸는 사람. 누군가는 허황되다 욕하겠지만.

     

    “…아니요, 없습니다.”

     

    나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아.”

    “…”

    “오성욱? 왜 부르고 난리지? 이 시간에?”

    “가보셔도 돼요.”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

    “아까 그 말, 나 못들은 걸로 할 거예요. 대안 없어요. 나 얘기 했어요!”

     

    대답하지 않았다.

     

    김민석이 사라지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침대 옆 협탁을 열어보니 쓰다 만 노트와 필기구(그래봤자 싸구려 볼펜이었다.)가 있었다. 오른손이 성치 않아 괴상한 모양으로 펜을 쥐었다. 아. 음. 입에서 나는 소리대로 적었다. 그 다음에는 내 이름이었다. 도경수. 볼수록 낯선 글자였다. 어머니, 아버지, 가족, 겨울, 사랑. 가지지 못한 단어들도 적었다. 루머. 친구의 이름도 적었다.

     

    변백현.

     

    획이 많았다. 꼭 종이를 조각내는 것 같았다.

     

    변백현.

     

    한 번 더 적었다. 일부러 흘려 썼는데, 그러고 나니 알아보기 어려워졌다.

     

    백현아.

     

    백현아, 라고 하면 편지의 시작이었다. 먼 과거의 <경수>는 그를 이렇게 불렀을까.

     

    백현아,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

     

    백현아.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는 책이 있어. 주인공은 약간 꺼벙한 남자인데, 매일 오후 박물관에 가. 열람시간은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두시. 월요일은 휴관. 남자는 월요일마다 우울해 해. 박물관을 가는 일이 남자의 전부거든. 박물관은 이름 그대로 쓸모 없는 것들을 모아둔 곳이야. 1972, 1973…모든 연도의, 자질구레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수집해두지. 남자가 박물관을 가면 친절하고 상냥한 직원이 어느 년도를 찾으시냐고 물어. 남자는 약간 으스대며 말해. 천구백이십이년이요. 몇 번을 본 책이라 사정을 훤히 아는지, 평을 하기도 하지. 천구백이십이년. 참으로 격렬한 해였죠.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는 노력에 골몰했으니깐요. 봐요. 열 네권이나 되잖아요?

     

    십 년 동안 자신의 개에게 말을 시키려고 했던 남자.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십 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부은 남자.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를 찾아 인생을 허비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을 살려보려고 애쓴 사람들, 사람들. 쓸모없는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지지만, 반복되는 일은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아.

     

    뭐가 있을까. 이를테면 짝사랑 같은 것이겠지. 부득이하게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는 바람에 생기는 비극. 돌려받지 못한 마음 때문에 괴로운 나날. 사실 그것들은 흔해서 공감을 사잖아. 그러니 박물관에 기록될 수는 없겠지. 기억을 되찾아 보려고 하는 건 어떨까. 사실 그것도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지. 사실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며 살잖아. 눈부신 며칠을 제외하곤 흐릿해지기 일쑤니까. 능력이 소멸하기만을 기다리며 지루한 훈련을 반복하는 이곳의 사람들은? 이건 애매하다. 매우 소수긴 하니까. 그래도 유일하진 않으니 모두가 박물관에 기록될 순 없겠지.

     

    그럼 이곳에서 사라진 기억으로 고통받으며 짝사랑에 허덕이는 건?

     

    아, 백현이 너도 포함이구나. ‘이곳에서, 사라진 기억으로 고통받으며, 짝사랑에 허덕이는 사람.’

     

    백현아 그럼, 우리 둘 중에 누가 박물관에 기록될까?

     

    그런데,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에 기록되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이 있을까.

     

    *

    늘 남에게 하던 말이 있었다. 그만하세요. 고집 피우지 마세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 날이 많았지만 한심하게 여긴 날도 있었다. <경수>는 이미 물에 잔뜩 젖은 종이에요. 소용없다니까요. 숱한 자조나 비아냥, 그것이 내 진심은 아니었다. 나는 사실 나로서 관심받고 싶었다. 간절히 원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여전히 아무도.

     

    도경수.

     

    종이 위에 쓴 이름을 읽었다. 그리곤 다짐했다.

     

    그만하자.

    고집 피우지 말자.

     

    포기하자.

     

    밖이 소란스러웠다. -씨!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다른 회복실(습격을 당한 쓰리 센티넬 중 변백현만 살아남으리란 법은 없었다.)을 찾는 사람인가 했는데 입구에서 소리가 멈췄다. 누군가 문을 부술 기세로 열었다. 백현씨! 뒤를 쫒던 직원의 얼굴이 보였다. 당연히 변백현도 보였다. 또 폭주인가…싶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이었다. 손발이 굳었다. 나는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모아 소진한 상태였다. 또다시 그가 위험해지면 이번에는 정말로 살릴 수 없을지도 몰랐다. 변백현이 성치 않아 보이는 몸을 이끌고 내게로 직진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상처 없이 멀끔한 얼굴이었다. 안심했다.

     

    “너 미쳤어?”

     

    나는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이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꿈을 꾸고, 헛된 망상을 하곤 했다.

     

    “…제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변백현과 각인하면서 오랜만에 상상이란 걸 했다. 가정은 하나였다. 내가 그를 살린다면 그는 고마워할까? 미안해할까? 수줍어할까(그럴리는 없겠지)? 화를 낼 수도 있겠단 생각도 했지만 금세 지웠다. 내 상상이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지만 남겼다.

     

    “무슨 생각으로 이래 너. 이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아?"

    “…”

    "모르겠지. 모르니까 이렇게 굴지. "

     

    김민석도 고맙다는 말이 먼저였는데.

     

    “살리고 싶었어요.”

    “…”

    “그게 답니다.”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랄 수 없다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그래도.

     

    “누가 살려달래? 바란 적 없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사과하지 마. 사과 받으려고 하는 소리 아니야. 그리고,”

    “…”

    “다시는 나서지마. 하지마. 그냥 신경 꺼, 좀.”

    “나 알아 들었어. 네 맘 충분히 알았어. <경수>가 다치는 게 싫은 거잖아.”

    “…”

    “너한테는 지금, 생판 남이…막 쓰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도경수.”

    “가이딩도 마찬가지고.”

    “…”

    “그러니까 말로만 그만두는 게 아니라, 방법을 찾아볼게.”

     

    “나 없다고 너 죽는 거 아니잖아. 가이딩, 난 해주고 싶지만 너에겐 곤욕인 거 정말 잘 알겠으니까. 내 손짓에 네 상처는 사라져도, 마음이, 마음이 말도 안 되게 망가진다는 거 이해했어. 받아들였어. 내가 포기할게. 그동안 내가 억지 부렸나봐.”

    “…”

    “이번에도 그랬어.”

    “…”

    “그렇게 해서라도, 살리고 싶었어. 그게 다야.”

     

    그게 다여서 미안해.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인데, 너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족할 따름이어서.

     

    멋대로 쏘아붙이고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변백현의 표정을 보는 게 두려웠다. 이 자세로 잠에 들기를 소망했다. 쉽지 않았다. 깜깜한 머리통으로 여러 장면이 지나갔다.

     

    신디가 의자에 앉아 발을 까닥였다. 언제나처럼 김민석의 자랑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맵시와 말투, 게다가 성품까지! 칭찬할 구석도 많았다. 나는 궁금해졌다. 좀 못된 질문이었다. 김민석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나요?(그렇게 매일 정성을 들여 시간을 할애해 남에게 내세울 만큼 귀한 존재라고 여기나요?)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에둘러 물었다.

     

    신디 씨는 안 불안해요?

    뭐가요?
    민석 씨가 변할 수도 있잖아요.

    민석 씨가 나쁘게 굴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러지 말라는 법 있나요.

    그래도.

    무슨 말 하는지 이해했어요. 제가 좀 대책이 없죠?

    아, 그런 뜻은.

    저도 알아요. 민석 씨가 저 좋아하는 건, 제 마음의 반절도 안 된다는 거.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요?

    보통은 중요하다고 말하죠.

    여긴 보통이 아니잖아요.

     

    저는 민석 씨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요.

     

    그렇게 말하는 신디의 얼굴에선 빛이 났었다. 장면이 분명해질수록 잠은 달아났다. 지독한 상념만이 남았다.

     

    신디가 부럽다.

    좋아하는 걸 마구마구 좋아하는 사람이 부럽다.

    잃을 계산같은 건 하지도 않고.

    상처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고.

    그저 마구마구.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은 중남미작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단편입니다.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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