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 D의 루머 10
  • 2020. 4. 28. 01:36
  • 센티넬버스 세계관

     

     

     

    *

    신디가 간 밤에 탈색을 했다며 자랑을 했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정직한 연보라색이었다. 신디의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마다 눈이 피로해졌다. 이 곳의 모든 것은 지나치게 밝았다.

     

    내게 채도란 사치품에 가까웠다. 밝은 옷을 입으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검은 것들은 대개 눈에 띄지 않았고 그것은 나를 편안케 했다. 루머는 내 옷장을 보며 네 옷장의 장은 장례식의 장이냐며 나무랐다. 클래식도 정도껏 클래식이지 너 정도면 색맹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라며 혀를 찼다. 기념일도 아닌데 노란색 후드티를 선물했다.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입지 않았다. 루머는 속상해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해주지 못했다. 밤이면 조용히 그 옷을 쓸어 본다는 걸. 샛노란 후드티는 밤에도 꼭 형광색으로 빛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암(暗)인 주제에 명(明)을 탐내는 신세였다. 부끄러웠다.

     

    “경수씨. 제가 말한대로 백현씨 상대로 실제로 해본 거 맞죠?”

    “대강 하긴 했어요.”

    “어쩐지. 아침부터 민석씨가 난리더라구요. 변백현 무슨 약하는 거 같다면서.”

    “약이요?”

    “하루 아침에 나을 상처가 아니었는데 완전히 멀끔해져서. 귀신보는 줄 알았대요.”

    “아…”

    “그 전과는 느낌이 달랐어요? 좀 부드러워졌나?”

    “그런 건 딱히.”

    “…애매하네요. 중요한건 그건데. 경수씨는 어땠어요?”

     

    몸 대신 마음을 많이 앓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처절한 새벽이었다.

     

    “비슷했던 것 같아요. 상처가, 옮겨오는 느낌.”

    “그 느낌 알죠. 전 매번 그럴때면 뿌듯하면서도 섬칫하더라구요.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액받이 인형 된 거 같달까. 물론 가이딩,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있긴 하지만요.”

    “원치 않는 사람의 가이딩을 해야하는 경우라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흐어, 저 민석씨 되게 좋아하는데. 그거랑은 좀 달라요. 어쨌든 나는 나잖아요. 가이딩은 나를 뺏기는 거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는 관계 중에 수탈이 아닌 게 있던가? 변백현은 나를 두고 순진하다고 했지만 내 생각엔 아니었다. 그저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뺏고 싶다>가 아닌 <뺏겨도 좋다>의 마음. <사랑해>가 아닌 <사랑해줘>라고 말하는 것. 신디는 뒤늦게 ‘되게 좋아한다는’말이 부끄러웠는지 연신 헛기침을 뱉었다. 변백현이 말한 순수는 아마도 저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신디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더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의 연속이었다.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나서더니 멀쩡한 센티넬 모형(센티넬 능력을 구현하고 있는 고무 재질의 물체였다. 미끈한 촉감과 비릿한 과일 향이 꼭 콘돔을 연상시켰다.)을 까맣게 그을렸다. 아, 왜 이래 나. 신디가 별안간 박수를 쳤다. 부끄러울 때면 나오는 신디의 버릇인가 보았다.

    “잠깐만요. 새 것 가져올게요.”

     

    원래라면 그을린 물체를 다시 가이딩해 보통의 상태로 돌려야했지만 지금의 신디에겐 무리였다. 신디는 비품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까만 자국은 먼젓번 내가 실패했을 때보다 그 색이 훨 짙고 범위도 넓었다. 관성을 잃은 모형은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고꾸라진 상태였다. 툭, 건드려도 그대로였다.

     

    “경수군은 팔자도 좋군요.”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이제껏 보아온 모든 사람의 장점만을 모아둔 얼굴이었다. 나이를 먹은 얼굴과 목소리였지만 피부에선 광이 났다. 일상복 차림인데도 풍기는 기운은 이 곳에서 허송 세월을 까먹은 그저 그런 센티넬이나 가이드가 아닌 완연한 상급자의 것이었다. 빈틈없이 들어맞는 무테안경.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와이셔츠.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발목을 감싸는 바지. 얼굴과 차림에 각이 선 남자였다. 인사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기색을 읽었다.

     

    이 사람도 <경수>의 적이군.

     

    “감탄이었는데. 기억과 함께 말도 잃은 건가요?”

    “아닙니다.”

    “좋네요. 말도 하고. 손도 움직이고. 저와 눈도 마주치고. 얘기도 하고.”

     

    의중을 읽기 어려웠다. 확실한 적대감은 나로서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변백현과는 달랐다.

     

    “훈련 성과가 아주 좋던데. 아직도 백현군과 그렇고 그런 가봐요?”

     

    <그렇고 그런 것>

    그렇게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나?

     

    “우리 아들놈만 불쌍하게 됐네. 그렇죠?”

    “죄송합니다만.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봐봐, 얼마나 불쌍해. 불쌍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응?”

    “…”

    “오-세-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처음 듣는다고 말 하면 안될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말했다간 눈앞의 남자가 나를 당장 어떻게 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기억난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긴 침묵에 남자가 안경을 고쳐 썼다. 애지중지 키운 아들놈에게 해를 입힌 도경수. 뭔지 몰라도 넌 진짜 쓰레기다. 다 까먹어도 그런 것은 까먹지 말아야지. 신디가 나와 남자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학회장님. 안녕하세요.”

    “추자양. 오랜만이네.”

    “그렇게 안 불러주셨으면 좋겠는데…”

    “내가 잘 까먹어서 그래요. 뭐였더라. 신디? 나 신디양, 은 영 입에 안붙는데. 그냥 부르던 대로 추자양이라고 해도 되지?”

    “아, 네…”

    “경수군 가르치는 건 안 힘들고? 기록 보니까 추자양 가이딩 수치 아주 좋던데. 그냥 민석군 전담하는 게 낫지 않나.”

    “아 충분합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

    “안타까워서 그래. 경수군 도와줘봤자 뭐해. 언제 또 기억 날아가서 뒤통수 때릴 줄 알고. 사실 경수군은 존재자체가 뒤통수잖아. 변변찮은 센티넬인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가이드로 나타나서는 말이야. 경수군 때문에 내가 고생이 많아요.”

    “아, 네네.”

    “추자양도 조심해. 경수군 무섭다니까.”

     

    “가끔 세훈이 생각도 좀 필사적으로 해줘. 아들놈 불쌍한 아버지가 이렇게 부탁할게.”

     

    ‘무서운 경수군’에게 하는 부탁치고는 협박조였다. <경수>가 잃어버린 사람이야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 낯선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선명한 살의는 처음 겪어보는 것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람을 까먹은 죄로 살인이라도 할 기세였다. 옆에서 신디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라고 신호를 보냈다. 나는 알아들은 척 했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필사적으로 해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알고보니 <경수>는 정말로 누군가를 죽이기라도 했던 걸까? 흉흉한 미스터리는 사실 전부 진실이고, 나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렸던 걸까. 어느 가정도 달갑지 않았다. 그렇지만 달갑지 않다고 회피할 수도 없었다. 내 머리가 잊었을 뿐 내 손에 누군가의 피냄새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기억 안나죠?”

    “뭘 말하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다 그렇긴 합니다. 방금 뵌 분도, 그 분의 자제도.”

    “전 경수씨랑 백현씨도 제가 관찰한 게 다일 뿐 잘 알지는 못해요. 경수씨랑 세훈이도 마찬가지구요.”

    “저랑 그 분이 무슨 사이였는지도 모르시겠네요, 그럼.”

    “세훈이가 경수씨를 많이 따라다녔죠.”

    “…저도 그랬나요?”

    “아뇨. 세훈이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어요. 제가 보기에는.”

    “실제로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군요.”

     

    하나

    셋.

     

    “제가 그 분을 죽이기라도 했나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에둘러 말한다고 죗값을 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아닐 거예요. 두 사람 사이, 나쁘지 않았어요. 세훈이가 죽은 건 아마 경수씨 잘못이 아닐 거예요.”

    “…”

     

    추측이었다. 신디는 두 사람 사이를 잘 모른다고 했다. 만약의 경우 <경수>가 그를 죽였을수도 있었다. 우발적인 살인이야 이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한 톨의 치정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졌고 비옥했던 땅은 시체로 뒤덮였다. 사람은 스스로에게만 나약했다. 타인을 생각보다 더 쉽게 해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종족이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했고 그래서 신디의 말은 내게 위안을 주지 못했다. 나는 벌써 머릿속으로 <경수>가 ‘세훈’이라는 사람을 어쩌다 죽이게 되었는지 그려보고 있었다. 고어 영화에서 본 장면들을 마구잡이로 떠올렸다. 방금 전 나를 째려보던 남자의 눈빛을 보아 이미 충분한 정황상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죽었다면 죽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은 그렇게 발전했다. 계속된 훈련에도 통 집중을 못했다.

     

    “민석 씨 잠깐 들를 생각이라는데. 괜찮아요?”

    “…상관없습니다.”

    “대충 귀띔해줬는데. 위에서 훈련이랍시고 백현씨를 혹독하게 굴린 모양이에요.”

     

    아, 어제 겨우 다 치료해놓은건데.

     

    “센터가 이래요. 인간미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어.”

     

    훈련이 잠시 중단되었다. 한가한 낮이라 휴게실에는 둘 뿐이었다. 신디가 줄 게 있다며 냉장고에서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넸다. 끌리진 않았지만 일단 받았다. 포도향이 나는 아이스크림은 꼭 신디의 머리와 그 색이 비슷했다. 와그작. 얼음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빨 아프다.”

     

    이빨이 아픈데 왜 그렇게 깨물지.

     

    “저요, 민석씨 전에 담당했던 센티넬도 빙결, 뭐 그런 능력이었어요. 제가 그 쪽 계열하고 상성이 좀 잘맞는다 그러더라구요? 전 추운거 되게 싫어하는데. 밖에 있을 땐 겨울에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갔어요.”

     

    이어질 말을 알았다. 누구의 삶도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실은 제일 빨리 변한다. 만약 당신의 삶이 당신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면 당신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혹은 당신이 보기 드문 행운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 다 다른데, 비슷한 점이 딱 하나 있어요. 폭주할 때 몸이 뜨거워 진다는거. 밖에서 죽을 때면 호흡이 멈추는 것처럼요. 아무리 능력이 빙결이었어도 마찬가지더라구요. 살아달라고 비는데 열이 그대로 인 거 있죠. 사람이 제일 고통스럽게 죽는 게 타 죽는 거라던데. 그렇게 생각하면 잠이 잘 안 와요. 그런 거 겪고도 멀쩡히 다른 사람 가이딩 하고 있는 내가 좀 섬뜩하기도 하고. 무뎌지는 건가, 싶고.”

    “…”

    “저 되게 쫄보라, 일할 때 말고는 제 몸에 상처 못내거든요. 그래서 그냥 이런거나 씹어요. 이빨 아프면 정신이 확 들더라구요. 여기가 어딘지. 센터가 얼마나 잔인한지.”

     

    신디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이스크림을 와앙, 하고 물었다. 이빨이 으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찬 걸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었더니 골이 띵했다. 얼얼한 입가를 만지며 나 또한 되새겼다. 내가 얼마나 나쁜지. 또 얼마나 더 나쁠 수 있는지.

     

    “민석씨, 여기!”

     

    김민석은 변백현과 함께였다. 변백현은 전해 들은 대로 피곤한 얼굴이었다. 밤사이 행한 치료가 무색할 정도로 어두운 낯빛에 마음이 쓰였다. ‘사람 좋은’ 신디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사무적인 수준이었다. 김민석이 오자 신디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대놓고 아양을 떠는 건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김민석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

     

    당연히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다.

     

    변백현은 나와 거리를 뒀다. 신디는 김민석에게 쉴 새 없이 쫑알거리다 보여줄게 있다며 김민석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딱딱한 흰 색 소파의 양 끝에 나와 변백현이 앉았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조금은 간절했다.

     

    얼음을 평생토록 씹는데도 가시지 않을 의심이었다. 나쁘고 나쁜 것. 악하고 악한 것.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원하는 대답은 못 들을 텐데.”

    “경수.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니.”

    “그럼,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것도 아니.”

    “어느 정도로 나빴는데요. 사람이라도 죽였나?”

    “뭐?”

    “오세훈,이라는 남자. 제가 죽였을수도 있나요.”

    “…”

    “중요한 문제예요.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 그렇게 나쁜 사람이냐고 묻는 데 눈가가 따가웠다. <경수>를 비호해본적 없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경수>가 저지른 짓이 내가 감당할 만한 일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내가 만약 사람을 죽여 놓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데다가 기억까지 도려내 거기서 느껴야 할 마땅한 죄책감마저 벗어 던진 종자라면 나는 가이딩이건 무엇이건 해낼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이 위악처럼 느껴졌다.

     

    그런 <경수>였다면 변백현이 사랑한 일도 없지 않았을까.

    남이 주는 사랑으로 체할 수준이었던 <경수>가, 고작 그 정도의 인간은 아니지 않았을까.

     

    “누가 그래?”

    “…”

    “오성욱?”

     

    오성욱이고 나발이고. 알려달라니까.

     

    “넌 그럴 위인 못돼.”

    “…”

    “작정하고 농땡이 좀 피우자고 해도 몇 날 며칠을 꼬셔야 했거든. 조화를 밟아도 마음 아파했고, 작고 귀여운 거라면 다 좋아했어. 좀 미련했지.”

    “…”

    “아니다. 미련한 줄로만 알았지, 내가.”

    “…”

    “네가 오세훈을 어떻게 죽여. 오세훈이 널 살리겠다고 했는데.”

     

    칭찬같지 않은 칭찬이었다. 그럼 그렇지. <경수>가 그 정도로 악독한 인간일리 없었다.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변백현의 말 한마디에 폭풍과도 같던 마음이 조용해졌다. 무서울 때면 본능적으로 엄마를 외치는 자식들처럼, 나는 변백현에게 기대고 있었다. 나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 그리고 가장 염려하는 사람.

     

    “그래서 오세훈 손 잡고 도망, 친 거 아니야?”

     

    창 밖으로 분홍색과 노란색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거대한 조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열대 우림의 식물처럼 괴기할 정도로 큰 조형물이었다. 센터에서의 삶이 늘 봄과 같이 따뜻하다는 걸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이해가 안 갔다. 거대한 꽃더미는 그림자도 거대했다. 꽃더미 그늘에 가려진 건물은  봄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정교하게 조각된 수술이 창문에 비칠 때면 벌레인 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반이었다. 밖에서 보던 SF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건 그 뿐 만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빛 입자가 변백현의 주위를 감쌌다. 센티넬이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릴때야 볼 수 있다던 ‘찌꺼기’였다. 물리적 상처와 같이 시각적으로 볼 순 없지만 분명히 센티넬에 생긴 비이상적인 동요. 센티넬의 신체는 그럴 때면 매연 가스를 내뿜는 기차처럼, 질 낮은 능력을 사방으로 방출시켰다. 육체적으로 퓨즈가 끊긴 상태를 ‘폭주’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그런 상태엔 붙은 이름도 없었다. 찌꺼기니 이물질이니 다들 멋대로 불렀다. 그러나 이름만 없었지 가이딩이 필요한 상태라는 건 분명했다.

     

    변백현은 <도망>이라고 애써 발음했다. 변백현을 향해 누군가 줌이라도 당긴 것처럼, 한껏 괴로운 몰골로-그렇지만 아닌척을 하면서-나를 쳐다봤다. 사람이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일이야 너무 흔해서 얘깃거리도 안 됐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에게 데였다. 사람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성장하거나 그 상처를 다시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었다. 변백현이 나에게 별 의미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를 힘껏 조롱했을 수도 있었다. 필사적으로. 열심히. 온 마음을 다해.

     

    그렇지만 변백현이었고,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살아있긴 하냐고.”

    “…”

    “행복해졌냐고.”

    “…”

    “내가 없어도 정말로 괜찮냐고.”

    “…”

    “차라리 그 때가 좋았던 것 같아.”

     

    변백현이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며 우는 것은 처음 보아서,

     

    나는 다가가지 못했다.

     

     

    멀리서 보면 살아있으나 가까이서 보면 죽어있는 것.

    마약을 먹여 키운 것처럼 오싹한 위압감을 주는 조화.

    꽁꽁 언 얼음을 아무리 깨문데도 상기할 수 없는 과거.

     

    늘 봄이어서 한 순간도 봄이라고 할 수 없는 계절 속에 서 있는,

     

    너와 나.

     

     

     

     

     

     

     

    /

    중간에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예전에 나왔듯이 강성은 시인의 '기일'중 한 부분 입니다.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