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 청순한 오후 D
  • 2020. 4. 27. 21:42
  •  

     

    193
    경수는 이런 인연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 매체를 불문하고 로맨스는 취향이 아니다.


    194
    하지만 사람은 로맨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195
    백현이 경수 쪽으로 가까이 앉는다. 면대면으론 처음이니 어색할 법도 한데 거침없었다. 경수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애를 쓴다. 핸드폰으론 잘만 말했던 것 같은데 막상 만나니 어떤 말도 잘 꺼내지 못했다. 굳이 백현이 아니어도 그전까지 오프로 만났던 사람들과, 나름 편안하게 잘 대화했던 것 같은데. 이 불편함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보다가 경수의 마음이 복잡해진다.


    196
    잘 보이고 싶다. 괜찮은 사람이었음 좋겠다. 허투루 말하기 싫다. 상대방이 나를 재미없거나 혹은 시시한 사람으로 여기면 어쩌지.

    197
    너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198
    백현은 가만히 경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봐도봐도 얼떨떨했다. 백현을 대상으로 한 일반인 실험카메라 같은 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군요, 역시 이런 일이 있을리 없죠-하고 빠르게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믿기지 않아 보는데 볼수록 믿기지 않았다. 처음엔 경수와 여기 앉아있다는 것이 그랬고, 보다보니 경수의 기운이나 분위기 같은 게 그랬다. 채팅창의 대화를 그대로 옮긴 사람이었다. (물론 경수가 떠는 바람에 평소보다 말수가 적은 것도 있었다.) 단정하고 예의 발랐지만 그렇다고 무르지도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스 마시듯 마셨다. 어른 같으면서 애 같았다.


    199
    뭘 그렇게 봐.
    신기해서.


    200
    형도 나 신기하죠, 지금.


    201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백현의 확고한 눈동자가 보였다. 너 나, 신기하지? 하고 묻는 얼굴이 단호했다. 신기한 건 맞는데 왜 신기하냐고 물어보면 좀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많은 이유들이 떠올랐다. 일단 이렇게 만난 건 당연히 신기해. 좀 무서울 정도야. 그 다음은 너의 얼굴이 신기해. 카페에선 어리고 귀여운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바깥에서 보니 선이 제법 날카로워. 나보다 세 살 이나 어리면서 겁먹지 않는 것도 신기해. 아니, 그건 어려서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면 어려서 가능한 일을 정말로 하고 있어서 신기해. 제 나이의 장점을 그대로 발휘하는 인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신기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서 신기해. 부끄러운 말인데, 그거. 첫 대화부터 섹스 포지션을 까놓고 별의 별 것이 다 간지러운 경수였다.


    202
    아, 미친.


    203
    신기함의 이유를 곰곰이 돌아보는 경수의 또렷한 두 눈이 한참동안 백현의 얼굴을 쳐다 볼 때, 백현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204
    백현은 스스로가 좀 미친놈 같다고 생각했다. 스무해를 돌이켜 볼 때 자신은 절대 ‘금사빠’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늘 모든 만남에 신중을 기했다. 오래 가는 연애도 있었고 상처가 된 연애도 있었으며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연애도 있었다. 늘 충실했다고 믿었다. 첫 눈에 반한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며 부풀렸었다. 스무살을 기점으로 자신의 DNA가 바뀐 게 아니라면 지금 드는 생각이며 마음은 빠르고 불순했다. 그것도 자기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형을 상대로. 그동안 급한 마음이 아니었던 건 급해지고 싶은 상대가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205
    키스하고 싶다.


    206
    백현은 얼떨결에 경수를 따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상태였다. (평소 백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반샷으로 해달라는 주문을 놓친 탓에 백현에겐 쓰디 쓸 텐데도 잘만 넘어갔다. 주변의 대화가 점점 멀어졌다. 여기는 카페도 칵테일바도 수영장도 모텔도 아닌 것 같아. 그냥 공중에 이 사람과 나의 테이블이 떠있는 것 같아. 음료를 먹고 있긴 한데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어.


    207
    졸업 학년이면 바쁘겠다.
    아, 뭐. 그렇게는.
    그래? 난 되게 바빴던 거 같은데.
    이맘때에도요?
    그랬던 거 같은데.
    그럼 벚꽃보러 간 적도 없겠네.

    208
    찔릴 질문에도 백현은 겁이 없었다. 캠퍼스 교정을 뛰어다니는 경수를 상상했다.  

    209
    근데, 꼭 벚꽃피면 비내리지 않아요?

    210
    백현이 나온 고등학교는 지역 주민들이 벚꽃을 구경하러 오는 곳이었다. 도심지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주변엔 숲이 우거져 있었다. 음악 시간엔 산으로 꽹과리를 치러 갔다. 산에서 목 매달고 죽은 선배가 있다는 괴담이 성행하기도 했다. 수업을 듣다보면 창문 밖으로 다람쥐가 다녔다. 백현은 그게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어차피 벚꽃이 피는 때는 매번 중간고사 기간과 겹쳤다. 게다가 벚꽃이 좀 흐드러지게 폈다 싶으면 꼭 비가 내렸다. 벚꽃은 오래된 스티커처럼 도로 위에 달라 붙었다. 눈앞의 풍경보단 학원이 급한 애들이 그걸 마구 짓밟으며 교문으로 뛰쳐 나갔다. 백현은 느긋하게 걸었다. 비 오늘 날이면 백현은 좀 센치해졌다. 왜 좋은 건 금방 사라질까. 

     
    금방 사라져서 다들 좋아하는 걸까.


    비 내리는 학교에선 젖은 흙 냄새가 났다.


    211
    그랬던가. 잘 기억이 안나네.
    벚꽃 보러간지 오래 됐구나.
    딱히 없었거든. 그거 너무, 음.
    음?
    데이트 같지 않아?
    나랑 데이트 하고 싶어요?


    212
    난 하고 싶어요.


    213
    벚꽃은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214
    경수는 하고 싶은 게 많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 보단 해야 할 것을 따져보며 살았다. 후자의 범위는 굉장히 넓어서, 사람과 사람 간의 간단한 예의범절이나 도의 같은 것들도 모두 경수가 세워 둔 원칙이었다. 원칙. 경수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그랬다. 누구는 그런 경수를 보고 심지가 굳다고 말했고 간혹 가다 답답하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수는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휩쓸릴 것들이 아니었다. 경수는 지키고 싶으면 지켰고 해내고 싶으면 해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겹치는 순간이 오면 누구보다 열심히 임했다. 수능이 그랬고 직업을 구하는 일이 그랬고 본가로부터의 독립이 그랬다. 연애나 섹스. 경수는 그것들이 늘 하고 싶었지만 꼭 해야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그것들에 성실했냐고 묻는 다면, 아주 성실하지는 않았다고 답할 것 같았다. 경수는 <데이트>를 입에 올리는 백현과 함께 있었다. 백현과의 데이트. 하고 싶은 건 당연했고 백현이 먼저 물어봐주었으니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벚꽃이 피는 기간은 길지 않았다. 경수는 주말에 겨우 짬을 낼 수 있는 회사원이었고 백현은(경수가 알기에)눈 코 뜰새 없이 바빠야 마땅한 졸업학년의 대학생이었다. 경수의 마음이 결연해졌다.


    215
    나도.


    216
    벚꽃을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217
    백현은 ‘사람없는 벚꽃’이라고 검색했다. 다들 백현과 같은 마음인지 ‘사람 없는 벚꽃 명소’, ‘한적한 벚꽃 명소’ 같은 게 연관 검색어로 떴다. 백현은 하나씩 읽어 보았다. 누가 봐도 홍보인 것 같은 게시물도 열심히 살폈다.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연인들. 사진을 잘 찍는 편은 아니었지만 경수의 사진이라면 욕심이 날 것 같았다. 자꾸만 경수 생각이 났다. 경수에게 영상통화라도 걸고 싶었다. 프로필 사진과 배경 모두 기본인 경수였다. 경수를 상상하는 일이 즐거워서 백현은 검색을 쉽게 멈추지 못했다. 여의도 벚꽃 축제에 갔다는 게시글을 보면 여의도 한 복판에 경수를, 강릉까지 떠났다는 글을 보면 강릉에 경수를 세워두었다. 벚꽃이 피는 데라면 모두 경수가 있었다. 물론 백현도 함께였다. 아 근데, 강릉까지 가려면 차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 차 없는데.


    218
    나 차 있어.
    형 운전 잘해요?
    못하진 않는 것 같아.
    그렇구나.


    219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백현은 이 말을 오늘처럼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날때보다 심했다. 잘 보이고 싶단 마음이 커질수록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켓을 다 입어보고, 처음 입었던 것을 다시 입고, 처음 것이 맘에 들면 바지를 갈아 입었다. 경수에게 차가 있다는 사실이 자꾸 백현을 조바심 나게 했다. 경수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달까. 앞자리 같으면 친구지 뭐, 하고 패기 넘치게 굴었다가 민망해졌다. 면허는 따뒀지만 해 본 운전이라곤 아버지를 대동해 시험삼아 동네 운동장을 돌아 본 게 다였다. 그러니 옷차림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백현은 다시금 자켓을 벗었다. 아, 이것도 별로야.


    220
    날씨가 우중충했다. 일기예보엔 오후 내내 구름이 껴있다고 했다. 경수가 도로변에 차를 댔다. 꽃샘추위로 으스스한 날씨였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사람 없는 곳을 찾아와놓곤 정말로 사람이 없으니 신기한 백현이었다. 경수가 먼저 걸어갔다. 경수의 머리 위로 벚꽃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221
    생각보다 좋다.
    다행이네.
    왜?
    꽃보러 왔는데 날씨가 이래서, 실망할까봐 걱정했어.
    실망할 게 뭐있어. 너 때문에 이런 것도 아닌데.

    그리고 왠지, 운치있지 않아?


    222
    경수가 운치있다고 해서 백현도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여기기로 하니 모든 풍경이 다 맘에 들었다. 백현은 밤새도록 봤던 블로그에서 봤던 말을 기억해낸다. 그 블로그도 백현과 경수처럼 흐릿한 날씨에 벚꽃 구경을 갔다고 했다. 실망했을거란 백현의 생각과 다르게, 게시물의 마지막엔 글쓴이의 귀여운 다짐이 적혀 있었다. 애인과 놀아서 뭐든지 좋다. 흐릿한 날씨에 벚꽃을 보는 것도 좋다. 내년에도 볼 꺼다. 내년에도 흐릿할지라도. 내년에 흐릿하면 좀 어때. 이 년 연속 이런 날씨에 벚꽃을 보는 커플은 우리 밖에 없을거다. 그럼 됐지 뭐.


    223
    도경수가 좋다는데,
    그럼 됐지 뭐.


    224
    멀리서 걷던 백현이 경수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백현과의 데이트 인 것도 잠시 잊고 있던 경수였다. 백현은 날씨가 영 걸리는 모양이었지만 경수는 맘에 들었다. 오히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벚나무가 더 아름다워 보인달까. 대비가 확실한 경치였다. 경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칸마다 사람이 빽빽한 건 회사로도 충분했다. ‘힐링’이란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녹는 자연 앞에 서니 또 입장이 달라졌다. 백현이 차가 있냐고 물어볼 땐 어딜 가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돌이켜보면 세심한 배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내는 데 급급해 상대방의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부류는 아니구나 싶었다. 쌓인 피로가 가셨다. 백현이 다가왔다.


    225
    손 좀 줘봐요.
    왜?
    괜히 사람 없는 데 온 거 아니니까.

     

    226
    내 손도 분명 비슷한 온도일텐데.
    왜 이렇게 따뜻하지.


    227
    백현은 스스로가 무서웠다. 손 하나 잡은 걸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까부터 손이 너무 잡고 싶었는데, 막상 잡고나니 손만 잡고 싶은 게 아니었다.


    228
    백현아.
    ....
    말 안하고 해도 돼.


    229
    도경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230
    키스하기에 적당한 때에 대해서, 백현은 모른다. 모르니 따질 수도 없다. 지금 이 입맞춤의 속도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성급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만난 지 하루만에도 몸까지 섞을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백현의 이야기도 경수의 이야기도 아니다. 백현은 말하지 않았고 경수도 밀어내지 않았다. 혀가 엉켰다. 백현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떨어지는 벚꽃을 맞은 것도 같았는데 확신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있던 경수가 푸스슷 웃었다.
     


    231
    너 되게 눈 꽉 감고 있더라.

     

    눈으로 사진 찍는 줄 알았어.


    232
    경수는 스스로가 놀라웠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나 싶었다. 어쩌면 늘 이런 인간 이었는데 상대를 못 만났던 건지도 몰랐다. 인간의 기본형이 이렇게 감성적이고 섬세하다면 세상이 지금보단 살기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경수는 알았다. 아무리 감성적이고 섬세한 인간이라도, 이런 저런 불행이며 사소한 일들에 휘말려 그런 부분들이 깎이고 무뎌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찰나가 경수를 순하게 만들었다. 정작 경수를 그렇게 만든 백현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눈을 감고 있는 걸 보자니 좀 얄밉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눈을 그냥 감은 게 아니라, ‘꼭’ 감고 있어서 마음이 누그러졌다. 쟤 나랑 섹스할때도 눈 감는 거 아냐?
    머릿속에선 금세 진도를 뺐다.


    233
    백현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손 잡고 싶어서 손 잡았더니 손만 잡고 싶은 게 아니었고, 키스까지 했더니 키스보다 더 한게 하고 싶어졌잖아. 장담컨대 내가 꽃구경 하는 사람 중에 제일 불순할거야.


    234
    아니 불순할 것 까지야 있나?


    235
    그렇지만 무슨 사이라고 정의내린 것도 아니잖아.


    236
    하는 짓은 연애가 맞는데 제대로 이름을 붙여준 적이 없었다. 백현은 고민에 빠졌다. 연애 상담 프로그램에서 봤던 여러 규칙 같은 것들, 이를테면 –여자는 ‘우리 사귈래?’라고 확실히 사이를 짚어줘야 한다.-같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이걸 남자와 남자 사이에도 치환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원칙이 남자와 남자 사이에 통용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백현은 주저했을 것이다. 이건 도경수의 경우다. 앞선 경험과 비교하기 싫었다.


    237
    차를 가지고 나온 경수가 백현의 도착지를 물었다. 백현이 생각에 골몰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경수가 조심스레 몇 마디를 얹었다.


    238
    혹시 아직 집주소까지 알려주기 부담스러우면, 다른 데로 얘기해도 돼.

    239
    백현은 대답대신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백현이 진짜 살고 있는 집이었다.

    240
    여기 맞아요.
    아. 응.
    앞으로 자주 오게 될테니까.

    241
    백현은 돌려 말했다. 우리는 서로 집을 알게 될 사이지. 서로의 집에 드나들 사이고, 나중엔 서로의 집도 마치 내 집인 것처럼 부르겠지. 나는 여기 살아.  
     

    242
    형은 어디살아?

    243
    백현의 예언대로 됐다. 백현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동기 녀석들 중 몇 명은 이미 불나방처럼 사귀었다가 헤어진 상태였다. 백현은 티내지 않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가지는 특유의, 다정한 온도 같은 것이 몸에 늘 배어있었고 그즈음 백현을 남몰래 짝사랑 하기 시작한 애들이 몇 있었다. 경수는 요즘 좋은 일 있냐는 물음을 들었다. 평소 직장 동료들에게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털어놓지 않는 경수여서 다들 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다들 의심은 했다. 저 사람 애인이라도 생겼나봐. 그러고 보니 봄은 봄인가 보네. 도경수씨가 저런 얼굴을 다하고. 백현은 경수를 하트가 가득한 이모티콘으로 저장해 두었고 경수는 ‘변백현’에서 성씨를 하나 뗐다. 백현. 엄마도 어머니고 아빠도 아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정직하게 성을 붙인 경수로서는 백현만이 유일한 두글자였다. 핸드폰 창에 ‘백현’이라고 뜨면 설렜다. 만나는 날은 많지 않았다. 경수덕에 배는 밝아진 백현은 사람들의 환심을 쉽게 샀다. 가깝게 지내는 놈들이 늘어났다. 백현을 부르는 행사가 많아졌다. 백현은 죄다 거절했다. 비싼 놈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무렴. 내가 얼마나 비싼데. 나 부르려면 돔페리뇽이 있어도 안 돼. 도경수가 있는 자리가 아니면 안 된다니까? 그런 말은 속으로 했다.


    244
    백현은 어느 날처럼 과행사에 불참을 선언했다. 무슨 놈의 학교가 주마다 행사가 있어. 신환회가 끝나면 대면식이 있었고 대면식이 끝나면 해오름식이, 해오름식이 끝나면 축제가 있었다. 백현은 그 모든 행사가 하루에 다 일어난다고 해도 그 자리에 가지 않을 사람이었다.


    245
    경수가 월차를 냈으니까.


    246
    백현은 경수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낮에는 경수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밤이면 어두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차 속이어도 좋았고 사람이 없는 길가도 좋았다. 참아온 것을 터뜨리듯 경수의 손이며 허리를 마구 주무르고 싶었다. 백현은 늘 키스보다 더 한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나면 키스 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됐다. 혀로 하는 섹스라는 건 백현에게만큼은 헛말이 아니었다.


    247
    와, 변백현 여기서 다 본다?

    248
    경수말고 다른 사람을 만날 계획같은 건 없었다.

    249
    선배님들 다 너 찾아. 빠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맨날 너 없다고 우리만 졸라 갈굼당하잖아. 과대가 불쌍하지도 않냐? 우리도 좋아서 가는 거 아냐. 새내기니까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저번에도 너 기어코 안와서 분위기 싸했는데. 그때 민종이. 너 민종이는 아냐? 1학년 과대. 과대 지훈 선배 화난 거 달래느라 완전죽을려고 그랬다. 민종이가 너 때문에 뭔 고생이야. 너랑 친하지도 않은데. 나같으면 같은 1학년들 고생하는 거 미안해서라도 오겠다.


    250
    백현은 경수가 어디부터 들었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일수도 있고, ‘새내기’부터 일 수도 있고, ‘1학년’부터 일 수도 있다. 늦깎이 새내기라고 구라를 치기엔 백현의 양심이 한계치였다. 경수는 언제나처럼 멀끔했다. 백현은 자꾸만 소매를 구겼다. 주름 진 옷차림이 초라했다.


    251
    경수는 천천히 물었다.

    252
    사는 데는 진짜야?
    이름은?
    좋아한다던 노래는?


    253
    경수는 하나만은 묻지 못한다.


    254
    내가 좋다던 건?


    255
    경수는 조금 후회했다. 나를 너무 주지 말 걸. 조금만 더 경계할 걸. 세상에 좋은 건 많지만, 마냥 좋을 순 없다는 걸 늘 생각하고 있을 걸. 너무 좋은 애인이 나이 같은 걸 속여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도록.


    256
    그런데 그럴 수 있나?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