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 애들 조용히 시켜야지.”

 

 

또다. 반장은 난데 꼭 수렴청정을 하는 듯한 저 태도. 못 미더운 눈길에 애들을 슬쩍 훑었다. 이미 조용해진 뒤다. 쟨 목소리가 낮고 인정하기 싫지만 호소력 있어서 굳이 나한테 조용히 시키라고 하지 않고 자기 입으로 해도 될 텐데. 불만이 솟는다. 표출할 구실은 없었다.

 

 

정돈된 교실을 만드는 건 반장의 책무다. 난 반장이고 녀석은 아니다. 아닌데 왜 나서? 묻고 싶지만 그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유치하잖아. 반장은 으레 덜 유치한 녀석이 하는 거라고 난 생각한다. 더 유치한 놈은 오락부장이 되는 거고.

 

 

“반장, 담임 선생님이 설문지 걷으라고 하지 않았어?"

 

사실 난 내가 반장이 될 줄 몰랐다. 

 

 

2학기 반장 선거의 후보는 나 포함 셋이었다. 제일 후달리는 건 나였다. 그도 그럴게 난 나갈 생각이 없었다. 박찬열이 장난친답시고 날 추천했는데 야! 뭐하냐! 하는 내 목소리는 묻혔고 교탁에 서있던 녀석은 내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후보 3, 변 백 현. 글씨도 참 또박또박했다. 경쟁자라곤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녀석은 연임을 노리는 1번 후보였다. 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내가 봐도 반장감이었다. 아마 녀석과 친한 사이였다면 녀석에게 성대모사를 보여줬을텐데. 어디, 내가 반장이 될 상이오?

 

 

덜떨어진 자세로 서있었다. 돌아가면서 공약을 말하라길래 박찬열을 째려봤다. 녀석은 담담한 목소리로 열심히 해볼게, 라고 말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역시 반장감이었다. 나를 필두로 반 애들이 짝짝 아니고 좍좍, 굼뜨게 박수를 쳤다. 2번은 음료수를 쏜다고 했는데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내 차례였다. 애꿎은 성대모사를 공약 대신 선보였다. 어디, 내가 반장이 될 상이오? 애들이 와학학 자지러졌다. 애들을 웃길 수 있는 건 반창의 책무와 거리가 멀다. 나는 낙선을 예감했다.

 

 

웬걸. 녀석과 두 표 차이로 반장이 됐다. 강화도령으로 유배돼 살다가 갑자기 왕위 자리를 덜컥 넘겨받은 철종의 심정이 이랬을까. 얼떨떨했다. 반 애들이 지나치게 유치한 까닭이었다. 괜히 녀석에게 미안해졌다. 열심히 해본다고 했으니까 만약 되었다면 이번에도 열심이었을텐데. 녀석에겐 나나 박찬열이 피부처럼 지니고 있는 구라 DNA가 없었다. 매사 진심같았고 난 그런 것 앞에선 어떻게 굴어야 할지 몰랐다.

 

 

“저기.”

“축하해, 반장.”

 

 

“잘 해봐.”

 

 

나를 반장, 이라고 제일 먼저 부른 것도 녀석이었다. 멋쩍었다. 여전히 미안했고. 그래도 그때까진 미안한 감정이 먼저였다. 녀석이 사사건건 내게 시비를 털기 전의 일이다.

 

 

“너 도와주는 거 아니야?”

“박찬열 눈치 뒤졌다. 이러니까 아까 눈치게임도 졌지.”

“졌다는 말 하지 말랬다.”

“루-우-즈.”

 

 

아무래도 녀석이 날 엿먹이는 것 같다는 말에 박찬열은 갸우뚱한 낯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도와주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속이 답답했다. 이게 문제였다. 녀석은 고단수였다. 반장 감이 아니라 왕이 될 물건이었다. 노론과 소론을 이리저리 주물렀던 숙종의 현신. 철종의 현신인 내게는 벅찬 상대였다. 어쩐지 분해서 박찬열을 들들 볶았다. 크아에서 졌을 때 나오는 소리를 따라하며 놀렸더니 답답증이 조금 가셨다. 그러나 딱 크아 한 판 만큼의 쿨타임이었다. 금세 녀석의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야, 그러지 말고 그냥 물어봐.”

“뭐라고 말해.”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니?”

“…”

“아니면, 너 내가 고까운 거 아니니?”

“말을 말자.”

“별론가.”

“너 한 대 맞고 싶은 거 아니니?”

“싫음 말어. 내 요지는 그거야.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지. 평소엔 잘만 하면서 왜 그러냐?”

 

 

맞다. 내 미덕이라면 솔직함이었다. 내게는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구분하는 눈이 있었다. 스스로에게도 가차없었다. 나는 손이 빨랐다. 발은 느렸고. 수학은 못했고 영어는 더 못했다. 듣기 평가를 할 때면 듣기 평가에 집중해햐 하는데 듣기 평가를 하고 있다는 상황의 초조함으로 발을 떨까 두려워 발을 떨지 않는 데 집중했다. 여러모로 교과 과목은 나와 사이가 별로였다. 내 빠른 행동력과 상황 판단은 또 다른 필드에서 빛을 발했다. 마우스를 유려하게 굴렸다. 애들 사이에선 이미 준 프로게이머였다.

 

 

박찬열에게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하다못해 부모님에게도 내 솔직함은 똑같이 적용됐다. 정곡을 찌르는 게 습관이었다. 진실은 원래 듣기 싫은 법이야. 얄밉게 지껄여 미움을 샀다. 이 세상이 거대한 rpg 게임이라면 나는 허름한 막사를 지키는 독설가 npg 따위를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에겐.

 

 

“몰라, 못하겠어.”

“헐. 변백현이 빼는 꼴을 다 보네.”

“안 내켜.”

 

 

녀석은 날 헷갈리게 했다. 난 원래 장점은 장점 단점은 단점 확실히 못 박는 사람이었는데 녀석의 특질은 그것이 한데 뒤섞여 어떤 때는 장점이 단점같았고 또 단점은 장점같았다.

 

 

우선 깔끔한 것. 나는 털털한 편이어서, 꼼꼼함은 내게 대표적인 다른 사람의 장점 중 하나였다. 집에 오자마자 씻는 사람들. 씻지 않고서는 침대위로 올라가지 않는 사람들. 엄마에게 혼날 정도로 지저분하진 않았다. 그러나 청결에 유달리 신경쓰는 쪽도 아니었다.

 

 

녀석은 나완 달리 눈이 밝았다. 구석구석 흠집을 찾아냈다. 반장, 여기 청소해야 할 것 같은데. 반장, 유리창 닦아야 하지 않을까. 녀석이 반장, 하고 부르면(이때의 반장은 좀 묵직한 톤이었다.)또 시정해야 할 무언가가 생겼단 신호였다. 나는 정정했다. 깔끔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었다. 주위 모든게 도무지 성에 차지를 않고 내딛는 걸음마다 불결하게 느껴진다면 인생이 피곤할 게 뻔했다.

 

 

그리고 말이 (지나치게) 없는 것. 나는 태생부터 말이 많았다. 빨빨거리길 좋아했다. 특기가 농담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필요한 말 외에 입을 열면 장기 어딘가가 닳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사렸다. 버릇처럼 나를 부르는 걸 제외하곤 누구를 부르는 일도 잘 없었다. 툭툭 치는 게 다였다.

 

 

당연히 단점으로 낙인찍어야 마땅했는데 쉽지 않았다. 박찬열의 말을 빌리자면 말없는 녀석은 좀 어려웠다. 도로록. 샤프를 굴리며 골몰하는 얼굴이 특히 그랬다. 사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녀석을 건드릴때면 다들 꼭 미팅에라도 나간 것처럼 저기…하고 수줍은 꼴을 했다.

 

 

왜? 하고 되묻는 얼굴은 매서웠다. 나는 인정했다.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건 녀석의 장점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무심한 눈깔로 날 훑으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데도 이렇게 뒤에서 까는게 다였다. 녀석에 앞에서면, 그러니까 앞에서면.

 

 

*

 

 

녀석의 뒤였다. 정확히는 뒤의 뒤.

 

 

토스트를 사러 나온 길이었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바막 자크를 잠그는데 녀석의 뒤통수가 보였다. (물론 인사할 깜냥은 없었다.)

 

 

대형학원이 끝나는 시간이나 주위 고등학교 애들이 한꺼번에 하교할 때면 라라분식은 사람으로 미어 터졌다. 녀석은 국어 시간에 시를 읊는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그냥 토스트 두 개에 햄치즈 토스트 두 개요, 했다. 와중에 내가 할 주문이랑 똑같았다. 이상한 궁금증이 일었다. 둘 중에 뭘 더 좋아할까? 괜히 추리했다. 녀석이라면 웬만한 일에 기본을 중시하니까, 아마도 그냥 토스트일 거라고.

 

 

인사는 녀석이 했다. 안녕. 벌써 한 입 먹는 중이었다. 볼이 빵빵했다.

 

 

자고로 오는 인사와 고백은 씹는 게 아니다. 부러 반갑게 대꾸했다. 어, 안녕. 그래도 어색함이 짙었다. 그러고 갈 줄 알았는데 자리를 지켰다. 다같이 화장실 가는 여자애들처럼 우두커니. 내 앞사람은 토스트를 스무 개나 주문했다. 내 탓도 아닌데 내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또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를 기다리며 토스트 한 개를 다 먹었다. 밖에서 먹으려고 산 게 아닐텐데. 돌려보내고 싶어서 말을 골랐다.

 

 

<괜찮으니까 가봐> 같은 말이 떠올랐는데 부적절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아리송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가 만약 녀석이 나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 다른 친구를 기다리는 거라든가 혹은 추가로 주문을 하려고 서있는 거라면? 아마 쪽팔림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거다. 난데없는 침묵. 달큰한 버터 냄새. 내 옆에 선 녀석의 무감한 눈빛.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였다.

 

 

“넌 무슨 맛 사갈거야?”

“어? 나, 어…불고기 네 개.”

“그 메뉴 좋아하는 구나.”

“어어, 좋아해. 무지.”

 

 

아, 젠장. 그냥 두 개에 햄치즈 두 개. 모종의 시트콤 제목같은 주문은 우리 집안의 불문율이었다. 불고기라니. 난 그냥 먹는 불고기는 좋아했지만 이렇게 곁다리 얹듯 샌드위치나 토스트에 넣은 불고기는 싫어했다. 녀석의 주문과 내 주문이 일치했다는 게 원흉이었다.

 

 

녀석을 꼭 따라하는 것처럼, 대단히 신경 써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는 게 어쩐지 맘에 걸렸다. 녀석은 수학 공식이라도 듣는 것 마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억해 두겠다는 얼굴이었다. 망했다. 녀석이 햄치즈 하나 불고기 하나를 사서 내게 불고기를 나눠주는 날이 오면 군소리 없이 처먹어야했다.

 

 

“너 이쪽 살지?”

“아.”

“저번에 봤어. 저기로 들어가는 거. 나도 같은 방향이야.”

 

 

녀석은 정말 말이 없다. 평소엔 이렇지 않다. 녀석을 내가 해명했다. 반쯤은 인정했다. 녀석이 이렇게 구는 건 나뿐이다. 학교에서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당했다. 책 잡힐까 두려워 나서서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흘린 우유를 닦고 애들을 야단쳤다. 유머로 뽑힌 반장이 진짜 반장 구실을 하려 드니 잘 먹히지 않았다. 대부분 내 일이 됐다. 그렇게 애써도 녀석의 눈엔 미달이었다. 꼭 하루에 한 번은 꾸중을 들었다. 그건 꾸중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게 꾸중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모르겠다.

 

 

쉽게 보면 꾸중이었다. 나는 쉽고 명확한 것이 좋았다. 꾸중으로 정의내렸다. 반장이 못 돼서 심술을 부리는 거라고 단언했다. 그럼 녀석은 내 안에서 찌질하다든가 뒤끝 오진다든가 하는 질 나쁜 형용사로 수식해야 합당했는데 그건 못했다. 박찬열한테 녀석이 내게 매일 시비를 건다는 투정을 부리는 걸로 끝냈다. 이런 자비는 처음이었다.

 

 

꾸중이 아니라면? 다시 짐작했다. 혼란한 마음에 토스트 봉지를 놓칠 뻔했다. 녀석이 내 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앗 뜨거, 별안간 엄살이었다. 그러더니 진담만 할 것 같은 얼굴로 농담이야, 했다.

 

 

끓는 물에 넣으면 얘가 끊는 게 아니라 물이 식을 것 같았는데. 나잇대 다운 엉뚱함에 마음이 동했다. 이건 다른 애들은 모를 녀석의 일면이었다. 나는 답을 내리길 좋아하니까, 단점인지 장점인지 판단을 해야 하니까, 수학이라면 학을 뗐지만 확실한 정답이 있는 걸 선호하니까, 녀석이 제 희멀건한 낯짝을 내게 들이미는 이유를 밝혀야했다.

 

 

“왜 그래?”

“뭘.”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내가 너한테만?”

“어, 나한테만.”

 

 

넌 뭘 내놓을 거야? 뻔뻔하게 요구했다.

 

 

“어, 음”

 

 

녀석이 당황했다. 그것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고마워서 그러는 것 같아.”

“내가 뭘 했다고.”

“…사실 나 반장하기 싫었거든.”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매년 반장이었어. 이번이 처음이야. 안 한 거.”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거 아닌가? 두 표 차이지만 어쨌든 내가 이겼으니 말이다. 충분히 따질 수 있는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다고.”

“그게 끝이야?”

“그럼?”

“고마운데 왜 맨날 시비야.”

“시비?”

“너 맨날 트집 잡잖아.”

“아…”

 

 

결국은 솔직해졌다. 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는 생각 못해봤는데.”

“…”

“도와준거야.”

“나를? 도와줬다고?”

 

 

나보다 상황판단도 한 수 아래, 게임 실력도 한 수 아래인 박찬열이 정답이었다. 녀석을 헛짚은 건 나였다.

 

 

“담임 되게 깐깐해. 먼지 진짜 싫어하고. 내가 말 안해줬으면 너 혼났을거야.”

 

 

그러니까 고마워하라는 건가? 남이었으면 벌써 시비 걸 타이밍이었다. 근데 난 또 가만히 있었다. 사실 남 중의 남은 녀석인데. 나도 이런 내가 낯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린 꾸중과 호통 말고는 제대로 된 소통을 해본 적 없었다. 녀석이 이렇게 나에게 주절거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거다.

 

 

“난 너 덕에 반장 안 해서 좋고.”

“…”

“넌 나 덕에 안 혼나고.”

“…”

“진짜, 그래서 도와준거야.”

 

 

녀석이 (정말) 까먹은 것 같지만 난 녀석을 이겼다. 녀석이 내팽개친 반장 왕관을 내가 주워다 쓰고 있는 게 아니란 소리다. 게임으로 따지면 엄연한 트롤짓이었다. 그런데도 녀석의 태도는 당당했다.

 

 

“담임은 널 못마땅해 하고 있어.”

 

 

위니비니에서 보던 단단한 초콜릿 두 개를 박아넣은 것 같은 눈동자. 긴 속눈썹. 아무렇지 않게 폭언이었다. 나도 아는 바 였다. 난 선생님들 모두에게 먹히는 타입은 아니었다. 몇 선생님들에겐 못말리는 재간둥이였지만 몇 선생님에겐 그저 골칫덩어리였다. 담임은 후자였다. 딱히 잘 보이고 싶진 않아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도 담임 싫어하니까 뭐, 쌤쌤으로 쳤다.

 

 

그나저나 녀석이 담임 선생님도 아니고 담임 쌤도 아니고 담임이라고 말하다니. 그것도 저렇게 진중한 목소리로. 역모를 꿈꾸는 충신같았다.

 

 

“알아.”

“담임은 야구를 좋아해. 기아 팬이고.”

“그래서 뭐.”

“우리는 다 타자야. 삼진아웃을 당하면 끝이거든. 생기부에도 얄짤없어.”

 

 

“넌 지금 한 번 아웃. 담임 시간에 지나치게 졸아서.”

 

 

영 알쏭달쏭한 소리였다. 뭔 말이야? 일갈할 타이밍도 놓쳤다. 이건 녀석의 목소리가 가진 힘이었다.

 

 

“한 번 더 아웃이면 반장 자리도 없던 일이 될 거야. 생기부도 엉망이 될 거고.”

“엄연히 투표로 뽑혔는데도?”

“그 사람 그런 거 신경 안 써.”

 

 

담임에 이어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나만 볼 수 있어요. 시덥잖은 말장난을 참았다.

 

 

“그럼 네가 그 자리를 꿰찰거고?”

“아니, 반장 자리가 공중분해 될 거야. 그리고 심부름 좀 해달라며 날 부르겠지.”

“이름 없는 반장이 된다는 거네.”

“뭐, 바지사장 같은 거.”

 

 

와학학. 녀석도 유머에 소질이 있었다. 녀석과 바지사장이라니. 너무 웃겼다.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이번 건 농담이 아닌가 보았다. 뻘쭘해졌다.

 

 

사이가 떴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이게 맹점이다. 난 뭐든 지르든 타입이고 그게 먹히면 먹히는 거고 아니면 아닌건데, 녀석은 날 머뭇거리게했다. 이렇게 되면 십중팔구 나가리였다. 갑분싸되기 십상이었다. 길거리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식으면 토스트 맛없어 지는데. 쟤 왜 저렇게 나 빤히보지. 먼저 말하라는 건가? 근데 뭘? 할 말 없는데. 바지사장 웃겼다, 아니 그건 아까 했어야 할 말이고.

 

 

“아무튼 고마워.”

 

 

난 얼버무리는 단어를 싫어한다. <아무튼>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냥 고마운 거랑 아무튼 고마운 것은 다르다. 앞에 것이 훨 진정성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도 녀석이 얼굴과 목을 막 문지르면서 생전 고마워란 단어를 처음 입 밖으로 내 본 사람인 양 수줍게 굴길래 봐줬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

“내가, 많이 도울게.”

 

 

사실 반장 자리야 안 하면 그만이었다. 안 맞는 옷이 불편했다. 내 방 청소도 제대로 안하면서 애들을 들들 볶는 것도 양심에 찔리고. 내 몫이 아닌 부담감으로 학교 생활이 버거웠다.

 

 

그까짓 생기부…는 아니구나. 열여덟에 포기하긴 좀 일렀다.

 

 

“둘 다 윈윈이잖아.”

 

 

녀석이 급하게 덧붙였다. 귀여웠다. ‘윈윈’하는데 꼭 중국어같이 들렸다. 뭐가 윈윈. 나만 독박쓴 것 같은데. 표현이 거슬렸지만 귀여워서 넘어가줬다. 이런 표현을 동갑내기 남자애한테 써본 건 처음이었다.

 

 

“악어와 악어새…몰라?”

 

 

급기야 낭설까지. 그거 순 구라인데, 하고 정곡을 찌를 수 있었지만 안했다.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누가 악어야 그럼."

“너 하고 싶어?”

“딱히.”

“나도 딱히.”

“그럼 어떡해. 한 명은 해야 하잖아.”

 

 

내 말에 녀석이 골몰했다.

 

 

“내가 할게.”

“뭘.”

“악어.”

“니가 크로커다일을 하겠다고.”

 

 

나름 조크였다. 원피스에 나오는 검은 머리의 악당.

 

 

“어떻게 알았어?”

 

 

엥?

 

 

녀석이 대로변의 가게를 가리켰다. 뜬금없는 위치였다. 스프라이트를 연상시키는 초록색. 못생긴 악어 이미지. 투박한 타이포. 매번 지나치기만 했었다. 모델은 이정재였는데 이정재마저 옷을 살리지 못했다. 나이들면 저런 옷 예뻐보일까? 박찬열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저기 우리 집 가게야.”

“…”

“남성 크로커다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녀석은 농담도 진담하듯 했다. 녀석 나름의 유머인가 싶어서 망설여졌다. 맞장구를 쳐야 하는 건지 배 잡고 웃어야 하는 건지 정하지를 못했다.

 

 

“여성도 있어?”

“아, 그건 역 근처에. 이모가 하셔.”

 

 

진짜인가보다. 고심한 게 민망해 목을 긁었다. 왔다 갈래? 물었는데 됐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면이 부담스러웠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특히 박찬열을 비롯한 나의 친구들. 몇 년짜리 놀림감인지 세기도 어려웠다. 왜 놀림감이냐고? 그야 못생긴 간판과 못생긴 옷들 사이에서 녀석과 단짝마냥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는 건.

 

 

그건 누가봐도 수상하잖아.

 

 

“그럼 나 가볼게. 가게 봐야해.”

“계산도 해?”

“그거야 당연히.”

“흥정도?”

 

 

녀석이 손님과 설왕설래하는 걸 상상하자 웃음이 터졌다. 단호한 말씨로 에누리 없습니다, 하면 손님이 포기할 게 뻔했다. 녀석은 내가 녀석을 얕잡아 본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삐쭉였다. 좀 신났다. 애들한테 갖가지 장난 치기를 좋아하는 나였는데 녀석의 반응은 단연코 탑이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애들(이를테면 박찬열)을 웃기는 건 싱겁다. 웃음이 별로 없는 애를 폭소하게 만들어야 그게 진짜였다.

 

 

“핸드폰 줘 봐.”

“왜?”

“이름 바꾸게.”

 

 

녀석은 망설였다. 아 줘봐봐. 확 뺏었다.

 

 

“반장이 뭐야, 딱딱하게.”

“…”

“헐. 우리 반에서 번호 있는 거 나밖에 없어?”

 

 

녀석의 주소록은 단촐했다. 엄마. 아빠. 형. 그리고 아마 중학교 때 친구거나 작년에 같은 반이었을 몇몇의 친구들. 그리고 반장.

 

 

“…반장 번호는 알아야지.”

 

 

묘하게 변명처럼 들렸다. 캐묻고 싶었는데 뭘 물어야 할지가 모호했다.

 

 

“됐다.”

“…”

“너 악어라며, 내가 악어새할게.”

 

 

한 글자 늘었다. 반장에서 악어새. 코드네임 같은 이름이었다. 녀석이 가게에서 전화를 받으면, 크로커다일 매장에서 악어새의 전화를 받는거다. B급 첩보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녀석은 그걸 한참 들여다봤다. 민망해졌다. 좀 낯간지럽나?

 

 

“내일 봐, 도경수.”

“…”

"아니, 도악어.”

 

 

그리고 막 뛰었다. 방금 나 뭐한거지? 난 그냥 반장에서 악어새가 된 걸로 만족해놓곤 녀석은 앙증맞은 애칭을 붙여줬다. 큰 차이가 있었다. 일단 난 그런 깜찍한 별명을 친구들에게 선사한 적이 없다. 오글거려서였다. 박찬열을 빡찬, 하고 이름을 잘라먹고 부른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이렇게 심장이 간지럽진 않았었다. 도악어라니. 그런 난데없는 호칭을 뱉는 나를 누가 말렸어야 했는데…카톡!

 

 

「토스트 다 식었겠다.」

 

 

「내일 봐」

「변악어새.」

 

 

희귀 조류 같은 작명이었다. 쉬지 않고 웃었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

 

 

세상에 숱하게 널린 잘못된 상식 중 대표적인 것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에 관한 이야기다. 악어새의 정식명칭은 악어물떼새 혹은 이집트 물떼새. 도요목 악어물떼새과의 조류. 학명은 플루비아 어쩌고. 실은 악어의 입안을 청소해 주는 일과는 관련이 없는 놈이다.

 

 

악어는 평생 50회 이상에 걸쳐 이빨 3000개를 갈기에 따로 청소부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악어에게 악어새란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얌전히 입을 벌린 악어가 이빨을 쑤시는 악어새를 기꺼워하는 삽화는 순 거짓이고.

 

 

악어와 악어새가 종을 넘나드는 세기의 파트너로 포장된 것은 누군가 악어새가 악어의 입속을 드나드는 것을, 그러니까 잡아 먹힐 게 분명한데도 입속을 들락날락 한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처구니 없는 우연보다 신상하나 알지 못하는 관찰자가 더 흥미롭다. 한낱 미물에서도 진리를 얻는 삶이란. 아마 이름은 복잡하고 업적은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는 과거 철학자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도 의문은 있다. 

 

 

악어새의 납작한 부리. 은회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깃털. 중앙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 길고 뾰족한 꽁지. 어느 것도 악어를 연상시키지 못한다. 하다못해 어떤 초록도 가진 바 없다. 우림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묻게 되는 것이다. 왜 이 새의 학명에 악어가 들어가 있는지를. 누가 너에게 악어라는 호를 허락했을까? 설마 네가?

 

 

컴퓨터 속의 악어새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해줄리 없다. 그러나 나는 악어와 악어새의 그럴듯한 연쇄를 발견해 낸 누군가처럼, 한번 가정해본다.

 

 

만약에 악어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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